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정호승 시인 / 전태일(全泰壹)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2.

정호승 시인 / 전태일(全泰壹)

 

 

쓰러진 짚단을 일으켜 세우고

평화시장에서 돌아온 저녁

솔가지를 꺾어 군불을 지피며

솔방울을 한줌씩 집어 던지면

아름다운 국화송이를 이루며 타오르는 사람

가난하면 가난할수록 하늘과 가까워져

이제는 새벽이슬이 내리는 사람

 

 

새벽편지, 민음사, 1987

 

 


 

 

정호승 시인 / 종이배

 

 

내가 생각한 전쟁 속에는 북한 소년이 띄운 종이배 하나 흐르고 있습니다. 아들의 마지막 눈빛이라도 찾기 위하여 이 산 저 산 주검 속을 헤매다가, 그대로 산이 되신 어머니의 눈물강을 따라, 소년의 종이배가 남쪽으로 흐릅니다.

 

초가지붕 위로 떠오르던 눈썹달도 버리고, 한 마리 물새도 뒤쫓지 않는, 돌아오지 않을 길을 종이배는 떠납니다. 빠른 물살을 헤치며 가랑잎들에게, 햇빛을 햇빛, 슬픔을 슬픔이라 말하는, 어머니의 고향으로 돌아가자 속삭이며, 뱃길을 찾아 기우뚱 기우뚱 전쟁과 평화를 싣고, 북한의 모든 가을 강물 소리를 싣고, 어제 내린 비안개를 뚫고 갑니다.

 

녹슨 철로 위에 뻐꾸기 울음 부서지는 이름 모를 능선과 골짝을 지나, 피난민들이 몰려가던 논두렁, 대바구니 속에 버려져 울던 갓난아기의 울음 소리와, 총 맞은 풀벌레들의 신음 소리를 들으며, 눈물 냄새 묻어나는 휴전선을 지나, 무관심을 나누며 평화로운 사람들의 가슴 속을 돌아, 종이배는 우리들의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햇빛 나는 마을마다 사람들이 모두 나와 손을 흔들고, 종이배는 어머니를 불러 봅니다. 반짝이는 강물 따라 아이들이 반짝이며, 신나게 기쁨의 팔매질을 하면, 햇살같이 나는 조약돌이 종이배에 내려앉고, 종이배는 강물 속 깊이깊이 흐르며, 또 한 번 어머니를 불러 봅니다.

 

어머니. 내가 생각한 평화로운 전쟁 속에 가을이 오면, 해마다 우리 나라의 소년들은 종이배를 띄웁니다. 모든 인간의 눈물을 닦아 줄 한 소년을 태우고, 종이배는 머나먼 바다로 길 떠납니다.

 

슬픔이 기쁨에게, 창작과비평사, 1979

 

 


 

 

정호승 시인

1950년 대구에서 태어나 경희대 국문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했다. 197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석굴암을 오르는 영희>가,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 <첨성대>가,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위령제>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슬픔이 기쁨에게》 《서울의 예수》《새벽편지》 등이, 시선집으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흔들리지 않는 갈대》 등이, 어른이 읽는 동화로 《연인》《항아리》《모닥불》《기차 이야기》 등이, 산문집 《소년부처》 등이 있다. <소월시문학상> <동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