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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시인 / 기마상(騎馬像)
살아 있는 힘의 동결 살아 있는 민중의 거센 힘의 동결, 전진하는 싸움의 동결 빛나는 근육의 파도와 쏟아져 흐르는 땀의 눈부심과 외침과 쇳소리들의 동결 뜨거운 대낮의 햇빛 아래서의 동결, 표정과 노여움과 용기의 동결 사랑의 동결, 부재(不在), 꽉 찬 부재(不在), 그러나 동결은 나이를 먹는다 기마상이 금이 가듯이 동결은 늙어 어린이 처럼 부드러워진다 다시금 움직이려 한다 굳게 다문 입술에 미소가 번진다 육체의 이 살아 있는 육체 의 기쁨이 샘솟는다 소리가 시작되려고 한다 말은 울려고 한다 발굽이 움직인다 말갈기가 움직인다 아아 그러나 햇빛 탓인가 더욱 강렬한 저 햇빛 탓인가? 바람 탓인가? 훈훈한 사(四)월의 바람 탓인가? 착각이었던가?
타는 목마름으로, 창작과비평사, 1982
김지하 시인 / 남한강에서
덧없는 이 한때 남김없는 짤막한 시간 머언 산과 산 아득한 곳 불빛 켜질 때
둘러봐도 가까운 곳 어디에도 인기척 없고 어스름만 짙어갈 때 오느냐 이 시간에 애린아
내 흐르는 눈물 그 눈물 속으로 내 내쉬는 탄식 그 탄식 속으로 네 넋이 오느냐 저녁놀 타고
어둑한 하늘에 가득한 네 얼굴 이 시간에만 오느냐 남김없는 시간 머지않아 외투깃을 여미고 나는 추위에 떨며 낯선 여인숙을 찾아 나설 게다
먼 곳에 불빛 켜져 주위는 더욱 캄캄해지는 시간 이 시간에만 오느냐 짤막한 덧없는 남김없는 이 한때를 애린
노을진 겨울강 얼음판 위를 천천히 한 소년이 이리로 오고 있다.
애린, 실천문학사, 1987
김지하 시인 / 노을 무렵
눈부신 흰 시루봉 저녁 어여쁜 분홍 노을 내 시린 이마에 타는 노을 행길 저기서 아이들과 함께 공받기 하는 내 속에 행길 여기서 아이들과 함께 공받기 보고 있는 내 속에 담배 피우며 신문을 읽고 있는 내 속에 노을 무렵에 되똥거리는 빛나는 재잘거리는 닭, 참새, 붉은 구름, 사철나무 스쳐 지나는 바람, 머언 거리의 노래 소리 노래 소리 속에 나와 함께 공받기 하는 아이들 속에 눈부신 흰 시루봉 저녁 어여쁜 분홍 노을 내 시린 이마에 타는 노을 우리 집에 문득 불 켜질 때 나는 다시 혼자다 오늘은 새벽까지 술을 마시자.
애린, 실천문학사, 1987
김지하 시인 / 녹슨 기관차 가득히 꽃을
당신이 내게 올 수 있다면 고원에 만발한 한아름 나리꽃 안고 산철쭉도 안고 그보다도 더 아리따운 환한 웃음 안고 내게 올 수 있다면 내가 나가 반겨 당신이 아닌 당신 몸이 아닌 당신의 꽃들과 웃음을 껴안고 눈물 흘릴 수 있다면 내가 이렇게 원주에서 해남으로 해남에서 원주로 북으로 남으로 남에서 북으로 오락가락할 이유가 없겠지 낡아빠진 석탄차 녹슬은 기관차 지금은 국민학생들 구경거리로 전락해버린 차 그 차 휴전선에 잘린 경의선 경의선 화통 그것을 타고 내가 당신에게 갈 수 있다면 그 기관차를 새파란 동백잎, 빛나는 유자 무더기, 향기 짙은 치자꽃으로 무화과들로 가득 채우고 싶다 그리고 못난 내 얼굴에라도 함박꽃 같은 달덩이 같은 째진 웃음지어 만나고 싶다 나 오늘 눈 내리는 원주 거리에 다시 서서 다시금 남쪽으로 돌아갈 자리에 서서 거리를 질주하는 영업용 택시를 보며 경의선 끊어진 철로 위에 홀로 남겨진 기관차 속에 홀로 남을 민족의 외로움을 생각하며 소주 한 잔을 국토 위에 붓는다 아 아 꽃들이여 너희들의 영광은 언제 오려는가.
价본ê 하얀방, 분도출판사, 1987
김지하 시인 / 달램
스산한 것 어디 마음뿐이랴 아프다 온몸이 여기저기 동백마저 얼어 시커먼 이 한때를 속절없이 달랠 뿐 밤이면 별바래기로 올려 달래고 나 또한 한 떨기 허공중에 별자리로 누워 내리 달래고.
별밭을 우러르며, 동광출판사, 1989
김지하 시인 / 동짓날
첫봄 잉태하는 동짓날 자시 거칠게 흩어지는 육신 속에서 샘물 소리 들려라 귀기울여도 들리지 않는 샘물 소리 들려라
한 가지 희망에 팔만사천 가지 괴로움 걸고
지금도 밤이 되면 자고 해가 뜨면 일어날 뿐
아무것도 없고 샘물 흐르는 소리만 귀기울여 귀기울여 들려라.
별밭을 우러르며, 동광출판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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