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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지하 시인 / 기마상(騎馬像)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3.

김지하 시인 / 기마상(騎馬像)

 

 

살아 있는 힘의 동결

살아 있는 민중의 거센 힘의

동결, 전진하는 싸움의 동결

빛나는 근육의 파도와

쏟아져 흐르는 땀의 눈부심과

외침과 쇳소리들의 동결

뜨거운 대낮의 햇빛 아래서의

동결, 표정과 노여움과 용기의 동결

사랑의 동결, 부재(不在), 꽉 찬

부재(不在), 그러나 동결은 나이를

먹는다 기마상이 금이 가듯이

동결은 늙어 어린이

처럼 부드러워진다

다시금 움직이려 한다

굳게 다문 입술에 미소가 번진다

육체의 이 살아 있는 육체

의 기쁨이 샘솟는다

소리가 시작되려고 한다

말은 울려고 한다

발굽이 움직인다 말갈기가

움직인다

아아 그러나 햇빛 탓인가

더욱 강렬한 저 햇빛 탓인가?

바람 탓인가?

훈훈한 사(四)월의 바람

탓인가? 착각이었던가?

 

타는 목마름으로, 창작과비평사, 1982

 

 


 

 

김지하 시인 / 남한강에서

 

 

덧없는

이 한때

남김없는 짤막한 시간

머언 산과 산

아득한 곳 불빛 켜질 때

 

둘러봐도 가까운 곳 어디에도

인기척 없고 어스름만 짙어갈 때

오느냐

이 시간에 애린아

 

내 흐르는 눈물

그 눈물 속으로

내 내쉬는 탄식

그 탄식 속으로

네 넋이 오느냐 저녁놀 타고

 

어둑한 하늘에 가득한 네 얼굴

이 시간에만 오느냐

남김없는 시간

머지않아 외투깃을 여미고

나는 추위에 떨며 낯선 여인숙을

찾아 나설 게다

 

먼 곳에 불빛 켜져 주위는

더욱 캄캄해지는 시간

이 시간에만 오느냐

짤막한 덧없는 남김없는

이 한때를

애린

 

노을진 겨울강 얼음판 위를

천천히 한 소년이

이리로 오고 있다.

 

애린, 실천문학사, 1987

 

 


 

 

김지하 시인 / 노을 무렵

 

 

눈부신 흰 시루봉 저녁

어여쁜 분홍 노을

내 시린 이마에 타는 노을

행길 저기서

아이들과 함께 공받기 하는 내 속에

행길 여기서

아이들과 함께 공받기 보고 있는 내 속에

담배 피우며 신문을 읽고 있는

내 속에 노을 무렵에

되똥거리는 빛나는 재잘거리는

닭, 참새, 붉은 구름, 사철나무 스쳐

지나는 바람, 머언 거리의 노래 소리

노래 소리 속에

나와 함께 공받기 하는 아이들 속에

눈부신 흰 시루봉 저녁

어여쁜 분홍 노을

내 시린 이마에 타는 노을

우리 집에 문득

불 켜질 때 나는 다시 혼자다

오늘은 새벽까지 술을 마시자.

 

애린, 실천문학사, 1987

 

 


 

 

김지하 시인 / 녹슨 기관차 가득히 꽃을

 

 

당신이 내게 올 수 있다면

고원에 만발한 한아름 나리꽃 안고 산철쭉도 안고

그보다도 더 아리따운

환한 웃음 안고 내게 올 수 있다면

내가 나가 반겨

당신이 아닌 당신 몸이 아닌

당신의 꽃들과 웃음을 껴안고 눈물 흘릴 수 있다면

내가 이렇게

원주에서 해남으로 해남에서 원주로

북으로 남으로 남에서 북으로

오락가락할 이유가 없겠지

낡아빠진 석탄차

녹슬은 기관차

지금은 국민학생들 구경거리로 전락해버린 차

그 차

휴전선에 잘린 경의선

경의선 화통

그것을 타고 내가 당신에게 갈 수 있다면

그 기관차를

새파란 동백잎, 빛나는 유자 무더기, 향기 짙은 치자꽃으로 무화과들로 가득 채우고 싶다

그리고 못난 내 얼굴에라도

함박꽃 같은 달덩이 같은 째진 웃음지어 만나고 싶다

나 오늘 눈 내리는 원주 거리에 다시 서서

다시금 남쪽으로 돌아갈 자리에 서서

거리를 질주하는 영업용 택시를 보며

경의선 끊어진 철로 위에

홀로 남겨진 기관차 속에 홀로 남을

민족의 외로움을 생각하며

소주 한 잔을 국토 위에 붓는다

아 아 꽃들이여

너희들의 영광은 언제 오려는가.

 

价본ê 하얀방, 분도출판사, 1987

 

 


 

 

김지하 시인 / 달램

 

 

스산한 것

어디 마음뿐이랴

아프다

온몸이 여기저기

동백마저 얼어 시커먼 이 한때를

속절없이 달랠 뿐

밤이면

별바래기로 올려 달래고

나 또한 한 떨기 허공중에

별자리로 누워 내리 달래고.

 

별밭을 우러르며, 동광출판사, 1989

 

 


 

 

김지하 시인 / 동짓날

 

 

첫봄 잉태하는 동짓날 자시

거칠게 흩어지는 육신 속에서

샘물 소리 들려라

귀기울여도

들리지 않는 샘물 소리 들려라

 

한 가지 희망에

팔만사천 가지 괴로움 걸고

 

지금도 밤이 되면 자고

해가 뜨면 일어날 뿐

 

아무것도 없고

샘물 흐르는 소리만

귀기울여 귀기울여 들려라.

 

별밭을 우러르며, 동광출판사, 1989

 

 


 

김지하(金芝河, 1941~) 시인

1941년 전남 목포에서 출생. 서울대 미학과를 졸업. 1969년 『시인』지에 「황톳길」등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는 『황토』, 『타는 목마름으로』, 『오적』, 『애린』, 『검은산 하얀 방』, 『이 가문 날의 비구름』, 『별밭을 우러르며』, 『중심의 괴로움』, 『화개』 등이 있고, 『밥』, 『남녘땅 뱃노래』, 『살림』, 『생명』, 『생명과 자치』, 『사상기행』, 『예감에 가득 찬 숲그늘』, 『옛 가야에서 띄우는 겨울편지』, 대설(大說)『남』, 『김지하 사상전집 (전3권)』, 『김지하의 화두』 등 다수의 저서를 출간. 아시아, 아프리카 작가 회의 로터스 특별상(1975),  국제시인회의 위대한 시인상 (1981), 크라이스키 인권상(1981) 등과 이산문학상 (1993), 정지용문학상 (2002), 만해문학상(2002), 대산문학상(2002) 등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