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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호승 시인 / 짜장면을 먹으며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3.

정호승 시인 / 짜장면을 먹으며

 

 

짜장면을 먹으며 살아 봐야겠다.

짜장면보다 검은 밤이 또 올지라도

짜장면을 배달하고 가버린 소년처럼

밤비 오는 골목길을 돌아서 가야겠다.

짜장면을 먹으며 나누어 갖던

우리들의 사랑은 밤비에 젖고

젖은 담벼락에 바람처럼 기대어

사람들의 빈 가슴도 밤비에 젖는다.

내 한 개 소독저로 부러질지라도

비 젖어 꺼진 등불 흔들리는 이 세상

슬픔을 섞어서 침묵보다 맛있는

짜장면을 먹으며 살아 봐야겠다.

 

서울의 예수, 민음사, 1982

 

 


 

 

정호승 시인 / 천지(天池)에서

 

 

바람도 숨을 거두고

하늘도 마지막 숨을 거둔다

하늘보다 더 큰 하늘이 내려앉은

천지의 수면 위로

북한땅 흰구름떼들이 몰려 지나간다

 

빤히 건너다 보이는 병사봉(兵使峰)

핏줄이 흐르는 안개를 헤치고

북조선 초소 쪽으로 가는 길 앞에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발을 멈춘다

 

천지의 하늘을 가르며 칼새들만이

북한땅 천지 쪽으로 날아가고

침묵의 침묵으로 깎아 드리운 절벽 끝에서

나는 한 개 작은 바위가 되어

북한땅 백두산을 바라본다

 

백두산 흰눈 속에

한 송이 두견화로 피어 있는 그대

천지 물가에 말없이 앉아

노란 바위구절초 한 송이로 피어 있는 그대

 

별들은 따뜻하다, 창작과비평사, 1990

 

 


 

 

정호승 시인

1950년 대구에서 태어나 경희대 국문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했다. 197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석굴암을 오르는 영희>가,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 <첨성대>가,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위령제>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슬픔이 기쁨에게》 《서울의 예수》《새벽편지》 등이, 시선집으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흔들리지 않는 갈대》 등이, 어른이 읽는 동화로 《연인》《항아리》《모닥불》《기차 이야기》 등이, 산문집 《소년부처》 등이 있다. <소월시문학상> <동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