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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 시인 / 짜장면을 먹으며
짜장면을 먹으며 살아 봐야겠다. 짜장면보다 검은 밤이 또 올지라도 짜장면을 배달하고 가버린 소년처럼 밤비 오는 골목길을 돌아서 가야겠다. 짜장면을 먹으며 나누어 갖던 우리들의 사랑은 밤비에 젖고 젖은 담벼락에 바람처럼 기대어 사람들의 빈 가슴도 밤비에 젖는다. 내 한 개 소독저로 부러질지라도 비 젖어 꺼진 등불 흔들리는 이 세상 슬픔을 섞어서 침묵보다 맛있는 짜장면을 먹으며 살아 봐야겠다.
서울의 예수, 민음사, 1982
정호승 시인 / 천지(天池)에서
바람도 숨을 거두고 하늘도 마지막 숨을 거둔다 하늘보다 더 큰 하늘이 내려앉은 천지의 수면 위로 북한땅 흰구름떼들이 몰려 지나간다
빤히 건너다 보이는 병사봉(兵使峰) 핏줄이 흐르는 안개를 헤치고 북조선 초소 쪽으로 가는 길 앞에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발을 멈춘다
천지의 하늘을 가르며 칼새들만이 북한땅 천지 쪽으로 날아가고 침묵의 침묵으로 깎아 드리운 절벽 끝에서 나는 한 개 작은 바위가 되어 북한땅 백두산을 바라본다
백두산 흰눈 속에 한 송이 두견화로 피어 있는 그대 천지 물가에 말없이 앉아 노란 바위구절초 한 송이로 피어 있는 그대
별들은 따뜻하다, 창작과비평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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