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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신경림 시인 / 우리가 지나온 길에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4.

신경림 시인 / 우리가 지나온 길에

 

 

불기없는 판자 강의실에서는

교수님의 말씀보다

뒷산 솔바람소리가 더 잘 들렸다

을지로 사 가를 지나는 전차소리는

얼음이 깨지는 소리처럼 차고

서울에서도 겨울이 가장 빠른 교정에는

낙엽보다 싸락눈이 먼저 와 깔렸다

 

그래도 우리가 춥고 괴롭지 않았던 것은

서로 몸을 녹이는

더운 체온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강당 앞 좁은 뜰에서

도서관 가파른 층계에서

교문을 오르는 돌박힌 골목에서

부딪히고 감싸고 맞부비는

꿈이 있어서 다툼이 있어서 응어리가 있어서

겨울은 해마다 포근했고

새해는 잘 트인 큰길처럼 환했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지나온 길에

붉고 빛나는 꽃들이 핀 것을 본다

우리들 꿈과 다툼과 응어리가

부딪히고 감싸고 맞부비는 속에

화려하게 피워놓은 꽃들을 본다

 

난한 사랑노래, 실천문학사, 1988

 

 


 

 

신경림 시인 / 원격지(遠隔地)

 

 

박서방은 구주에서 왔다 김형은 전라도

어느 바닷가에서 자란 사나이.

시월의 햇살은 아직도 등에 따갑구나.

돌이 날으고 남포가 터지고 크레인이 운다.

포장친 목로에 들어가

전표를 주고 막걸리를 마시자.

이제 우리에겐 맺힌 분노가 있을

뿐이다. 맹세가 있고 그리고 맨주먹이다.

느티나무 아래 자전거를 세워 놓은

면서기 패들에게서 세상 얘기를 듣고.

아아 이곳은 너무 멀구나, 도시의

소음이 그리운 외딴 공사장.

오늘밤엔 주막거리에 나가 섰다를

하자 목이 터지게 유행가라도 부르자.

사이렌이 울면 밥장수 아주머니의

그 살찐 엉덩이를 때리고 우리는

다시 구루마를 밀고 간다.

흙먼지를 뒤집어 쓰고 밀린 간조날을

꼽아 보고. 건조실 앞에서는 개가

짖어 댄다 고추 널린 마당가에서

동네 아이들이 제기를 찬다. 수건으로

볕을 가린 처녀애들은 킬킬대느라

삼태기 속의 돌이 무겁지 않고

십장은 고함을 질러 대고 이 멀고

외딴 공사장에서는 가을 해도 길다.

 

농무, 창작과비평사, 1975

 

 


 

 

신경림 시인 / 유아(幼兒)

 

 

1

 

창 밖에 눈이 쌓이는 것을 내어다보며 그는

귀엽고 신비롭다는 눈짓을 한다. 손을 흔든다.

어린 나무가 나무 이파리들을 흔들던 몸짓이 이러했다.

 

그는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것이다.

눈이 내리는 까닭을, 또 거기서 아름다운 속삭임들이 들리는 것을

그는 아는 것이다―충만해 있는 한 개의 정물이다.

 

2

 

얼마가 지나면 엄마라는 말을 배운다. 그것은 그가

엄마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비밀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모르고 있다.

 

꽃, 나무, 별

이렇게 즐겁고 반가운 마음으로 말을 배워가면서 그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비밀을 하나 하나 잃어버린다.

비밀을 전부 잃어버리는 날 그는 완전한 한 사람이 된다.

 

3

 

그리하여 이렇게 눈이 쌓이는 날이면 그는

어느 소녀의 생각에 괴로와도 하리라.

 

냇가를 거닐면서

스스로를 향한 향수에 울고 있으리라.

 

농무, 창작과비평사, 1975

 

 


 

신경림 시인

1935년 충북 충주에서 출생. 동국대학교 문리대 영문과를 졸업. 이한직의 추천으로 월간 《문학예술》에 〈낯달〉1955. 12), 〈갈대〉(1956. 2), 〈석상〉(1956. 4)을 발표하며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농무』, 『새재』, 『달넘세』, 『남한강』, 『가난한 사랑의 노래』, 『길』 등과 산문집 『민요기행 1·2』, 『강따라 아리랑 찾아』, 『시인을 찾아서』, 『낙타』 등이 있음. 만해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이산문학상, 단재문학상, 공초문학상, 대산문학상을 수상. 현재 동국대학교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