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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 시인 / 파도타기
눈 내리는 겨울밤이 깊어갈수록 눈 맞으며 파도 위를 걸어서 간다. 쓰러질수록 파도에 몸을 던지며 가라앉을수록 눈사람으로 솟아오르며 이 세상을 위하여 울고 있던 사람들이 또 이 세상 어디론가 끌려가는 겨울밤에 굳어버린 파도에 길을 내며 간다. 먼 산길 짚신 가듯 바다에 누워 넘쳐버릴 파도에 푸성귀로 누워 서러울수록 봄눈을 기다리며 간다. 다정큼나무숲 사이로 보이던 바다 밖으로 지난 가을 산국화도 몸을 던지고 칼을 들어 파도를 자를 자 저물었나니 단 한 번 인간에 다다르기 위해 살아갈수록 눈 내리는 파도를 탄다. 괴로울수록 홀로 넘칠 파도를 탄다. 어머니 손톱 같은 봄눈 오는 바다 위로 솟구쳤다 사라지는 우리들의 발. 사라졌다 솟구치는 우리들의 생(生).
슬픔이 기쁨에게, 창작과비평사, 1979
정호승 시인 / 혼혈아에게
너의 고향은 아가야 아메리카가 아니다. 네 아버지가 매섭게 총을 겨누고 어머니를 쓰러뜨리던 질겁하던 수수밭이다. 찢어진 옷고름만 홀로 남아 흐느끼던 논둑길이다. 지뢰들이 숨죽이며 숨어 있던 모래밭 탱크가 지나간 날의 흙구덩이 속이다.
울지 마라 아가야 울지 마라 아가야 누가 널더러 우리의 동족이 아니라고 그러더냐, 자유를 위하여 이다지도 이렇게 울지도 피 흘리지도 않은 자들이 아가야 너의 동족이 아니다. 한국의 가을하늘이 아름답다고 고궁을 나오면서 손짓하는 저 사람들이 아가야 너의 동족이 아니다.
초승달 움켜쥐고 키 큰 병사들이 병든 네 엄마방을 찾아올 때마다 너의 손을 이끌고 강가로 나가시던 할머니에게 너는 이제 더 이상 묻지 마라 아가야 그리울 수 없는 네 아버지의 모습을 꼭 돌아온다던 네 아버지의 거짓말을 묻지 마라 아가야
전쟁은 가고 나룻배에 피난민을 실어나르던 그 늙은 뱃사공은 어디 갔을까 학도병 따라가던 가랑잎같이 떠나려는 아가야 우리들의 아가야 너의 조국은 아프리카가 아니다. 적삼 댕기 흔들리던 철조망 너머로 치솟아 오르던 종다리의 품속이다.
슬픔이 기쁨에게, 창작과비평사,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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