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정환 시인 / 4․19
살다 보면 오는구나 이런 날이 다시 어둠 뚫고 백일하에 드러난 기나긴 행렬에 섞여 내 등어리는 쏟아져 내리는 자유에 흠뻑 젖는다 진압대는 페퍼포그를 마구 쏘아 대고 우리를 포위하고 밀고 밀리고 그러나 밀려도 밀려도 밀려날 수 없는 외침이 이리 길구나 짓밟혀 세멘바닥에 코피를 쏟으며 한없이 쓰러지면서 분단된 나라 그래도 푸른 하늘 치솟아 그래도 그래도 한결같은 자유의 행렬이 이리 길구나 찢겨진 맨살이 드러난 어깻죽지를 맞잡고 우는 것은 몽둥이에 맞아 터진 내 얼굴 아니라 우는 것은 구둣발에 짓밟혀 찢어진 내 귓창, 네 입술 아니라 조국이다 부모형제다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것 지금은 너무도 멀리 있는 지금은 숨죽여 흐느끼고 있는 상처투성이 우리의 나라 진압대는 페퍼포그를 쏘아대고 마구 포위하고 닥치는 대로 우리의 성난 가슴을 두드려댄다 비여 비여 백일하에 쏟아지는 해방이여 우리의 기쁨이여 쓰러지고 또 일어서리라 짓밟히고 또 부둥켜안으리라 비는 억수로 내리고 마구 흩어지는 대열 흔들리지 않게 하나가 되자 노래 속에서 앞서서 가노니 외침 속에서 쓰러진 자 일으키며 땅을 치며 흩어졌던 봇물이 다시 줄기를 이루며 거세디거센 해일로 덮칠 때 아아 우리가 바라는 정의만큼은 이렇게 끝도 없이 외치고 싶다 우리가 바라는 통일만큼은 이렇게 백일하에 드러나 외치고 싶다 자유여 정의여 진리여 우리밑도 없이 끝도 없이 눈물 흐르는 춤을 추며 전진하리라
좋은 꽃, 민음사, 1985
김정환 시인 / 검붉은 눈동자
기차는 구식이다 음침한 시대가, 끝났다는 듯이 기름 묻은 이슬이 검게, 선로 위에서 반짝인다 아직 젖어 있는 것은 무엇인가 1950년대를 생각한다 강철이 강철과 부딪쳐 인간이 밥과 미래를 열망했던 시절 눈동자여 젖어 빛나던 검붉은 눈동자 이 매니큐어의 세상에서 기차는 구식이다 암울한 시대가 끝났다는 듯이
기차에 대하여, 창작과비평사, 1990
김정환 시인 / 겨울 복날
세검정 다리 밑에서 허름한 차림의 사내 둘이서 개를 두 마리씩이나 나무막대에 걸어 불에 끄슬리고 있었는데 왜 나는 무턱대고 그것이 훔친 개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을까 생각했을까, 나를 올려다보는 그들의 눈초리는 내려다보는 나보다 더 의젓해 보였는데 늠름해 보였는데, 해볼 테면 해보라는 듯이 그들의 눈에는 광기가 아닌 또렷한 살기가 번득이고 있었는데 검댕이 묻은 그들의 아직도 배고픈 눈초리에서 내가 본 것은 측은함이었을까, 복수였을까 도대체 왜 나는 그 백주에 대낮에, 몰래, 슬쩍, 아니면 재빨리,……이런 따위의 음흉한 말들만 기억에 떠올렸을까 동정이었을까 부끄러움이었을까 하얗게 눈 내려 쌓인 벌판, 모처럼 개울물 풀린 자리 옆에서 끄슬려도 끄슬려도 개의 내장은 더욱 새빨갛고 이빨은 더욱 새하얗고 몸뚱이가 시커매진 개의 시체를 보면서 사내의 억센 두 손이 그 개의 내장 속을 자신있게 휘휘 저었을 때 개고기라면 질색하던 나의 자존심이 흔들렸을까, 왜 그리 침 흘렸을까 도대체 왜 그리 속이 후련했을까 아름다움이란 하나의 습관일 뿐일까
지울 수 없는 노래, 창작과비평사, 1982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우원호 시인 / 페르시안 고양이와 백만 송이 연꽃 외 1편 (0) | 2020.02.05 |
|---|---|
| 송연숙 시인 / 서명 외 1편 (0) | 2020.02.05 |
| 정호승 시인 / 파도타기 외 1편 (0) | 2020.02.05 |
| 김백겸 시인 / 횃불 (0) | 2020.02.04 |
| 신경림 시인 / 우리가 지나온 길에 외 2편 (0) | 2020.02.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