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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송연숙 시인 / 서명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5.

송연숙 시인 / 서명

 

 

인동넝쿨에 인동 꽃 피었다

어디에서 어디까지 가는 향기냐고 묻고 싶은데

꽃들, 지독한 필체로

줄기마다 서명을 하고 있다

 

존재들, 저마다의 필체로 서명을 한다 입술 서명으로 연서를 완성하는 앵두, 푸른 모자의 목련 잎사귀는 목판본 새기듯 정갈한 필체를 가졌다 잎사귀 사이마다 검붉은 간인間印까지 찍어가며 서명하는 것을 좋아하는 뽕나무, 단 한 번의 서명으로 가랑잎처럼 날아간 집문서와 흘림체의 구름으로 흩어지는 가족들, 함초롬 바탕위에 햇살만 꾹꾹 받아쓰는 자주 달개비는 거느릴 식구들이 완두콩알처럼 많았다

 

초서체의 노련한 필체로

아침을 휘휘 감아 오르는 나팔꽃 옆에

엉겅퀴의 필체만 흉내 내는 지칭개, 지천이다

밤무대를 전전하는 짝퉁 같은 지칭개지만

너훈아에게는 너훈아의 삶이 있다고

의심하지 말라고

틀림없는 계절이라고

저마다의 서명으로 제철을 공증公證하는 것이다

 

식물들의 서명은 정확하다

공중과 땅속 가리지 않고

심은 곳, 날아와 안착한 곳 모두

그 증거를 다하고 있다

 

2019년 《국민일보》 신춘문예 밀알상 당선시

 

 


 

 

송연숙 시인 / 바다로 가는 길

 

 

1.

 

한 줄이다

모텔의 창을 열면

해송의 우듬지에 수평선이 걸려 있다

 

위험 도로 끝, 이라고 쓴 이정표 아래

입을 벌린 물고기

바다로 가는 길을 묻고 있다

 

2.

 

바닷가 소나무

거친 바람을 맞는 것이 타고난 업이다

파도소리 밀려와 앉을 틈 없이

벗겨져 나가는 소나무의 살 허물,

맨살 위로 짠 바람 빛나게 몰려온다

검은 눈물이 된 솔방울

긴 속눈썹이 젖는다

누가 저 눈물을 호리병에 담아 위로해 줄 것인가

 

3.

 

솔잎이 뭉쳐진 줄 알았다

죽어 누운 새 한 마리

솔잎 깃털 사이로 하얀 뼈 몇 개 삐죽 올라와 있다

눈을 감싸던 동그란 뼈

허공을 굴리며 먼 바다로 눈길을 보내고 있다

이제 바람은 그의 날개를 가볍게 들어 올릴 것이다

망망대해를 날아

한 점, 찾을 수 없는 마음 지나는 동안

어쩌면 아침 햇살이 될 지도 모르지

 

4.

 

위험 도로 끝, 그 앞에 다시 선다

끝이라는 말은 얼마나 많은 칼날을 품고 있는가

부드러운 혀가 입천장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무너질 것 같지 않은 침묵, 그 기둥에 매달려

얼마나 많은 거리를 헤매어 다녔는지

옥상으로 향하는 젖은 발걸음에 놀라

축축해진 꿈을 깨면서도 알지 못했다

호흡하는 매 순간이

끝의 끝, 시작의 시작인 것을

길의 끝이라 한들 무엇이 그리 위험하겠는가

가속도를 붙이며 달려 온 이 곳

 

5.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바다와 마주 앉는다

허공을 지우며 가는 갈매기 한 마리

바다의 발톱 한 끝이 가슴을 치고 달아난다

 

 


 

송연숙 시인

2016년 월간 《시와 표현》 신인상으로 등단. 2019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당선. 2019년 《국민일보》 신춘문예 밀알상 당선. 시집으로 『측백나무 울타리』(시와표현, 2019)가 있음. 현재 『시와 표현』 편집장, 한국시인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