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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하림 시인 / 우리가 만났던 시간들
새 한 마리, 잿빛으로 날아가 넋을 달래는 무량군 무량면 무량리
겨울 어둠이 내리면 나무도 짐승도 말이 없고 울타리만이 공중 높이 떠올라 울어댄다
아무리 불러도 대답 없는 신이여 그 나라에서는 아직도 눈이 내리는가. 그 나라에서는 눈을 맞으며 눈 속을 사람들이 걸어가는가
일천 미터, 이천 미터, 삼천 미터, 무량산 상상봉까지 올라가면 겨울나무들이 아직도 세차게 몸을 흔들고
우리가 만났던 시간들이 비렁뱅이 모습으로 사라져간다. 눈송이가 후두둑 후두둑, 정수리를 차갑게 친다.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 문학과지성사, 1991
최하림 시인 / 우리나라 1975년(年)
잇몸이 없는 시린 이빨로 앙상한 가지를 벌리고 서 있는 가로수 밑둥을 물어뜯어도 가로수들은 아파하지도 않고 우리들의 분도 풀어지지 않네
이 발길 그리고 저 돌멩이 돌멩잇길 서남해의 대숲마을이나 마늘냄새 매캐한 중강진의 살얼음 속에서도 사람들은 입을 다물고 여윈 손목을 끌어 잡을 줄 모르네
그러나 사람들은 서로 다르나 알아들을 수 있는 사투리로 말하고 끌어잡지 못하나 그 손으로 일하면서 고난의 시대를 함께 사네
아아 비바람에 씻긴 바윗돌 같은 얼굴 모진 불행을 다 삼키고도 표정없는 얼굴 그러한 얼굴로 서 있는 시대여 네 완강한 몸뚱이를 잇몸이 없는 시린 이빨로 물어뜯고 뜯어도 시대는 아파하지도 않고 우리들의 분도 풀어지지 않네
우리들을 위하여, 창작과비평사,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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