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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하림 시인 / 우리가 만났던 시간들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4.

최하림 시인 / 우리가 만났던 시간들

 

 

새 한 마리, 잿빛으로 날아가 넋을 달래는 무량군 무량면 무량리

 

겨울 어둠이 내리면 나무도 짐승도 말이 없고 울타리만이 공중 높이 떠올라 울어댄다

 

아무리 불러도 대답 없는 신이여 그 나라에서는 아직도 눈이 내리는가. 그 나라에서는 눈을 맞으며 눈 속을 사람들이 걸어가는가

 

일천 미터, 이천 미터, 삼천 미터, 무량산 상상봉까지 올라가면 겨울나무들이 아직도 세차게 몸을 흔들고

 

우리가 만났던 시간들이 비렁뱅이 모습으로 사라져간다. 눈송이가 후두둑 후두둑, 정수리를 차갑게 친다.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 문학과지성사, 1991

 

 


 

 

최하림 시인 / 우리나라 1975년(年)

 

 

잇몸이 없는 시린 이빨로

앙상한 가지를 벌리고 서 있는

가로수 밑둥을 물어뜯어도

가로수들은 아파하지도 않고

우리들의 분도 풀어지지 않네

 

이 발길 그리고 저 돌멩이 돌멩잇길

서남해의 대숲마을이나 마늘냄새

매캐한 중강진의 살얼음 속에서도

사람들은 입을 다물고

여윈 손목을 끌어 잡을 줄 모르네

 

그러나 사람들은 서로 다르나

알아들을 수 있는 사투리로 말하고

끌어잡지 못하나 그 손으로 일하면서

고난의 시대를 함께 사네

 

아아 비바람에 씻긴 바윗돌 같은 얼굴

모진 불행을 다 삼키고도 표정없는 얼굴

그러한 얼굴로 서 있는 시대여

네 완강한 몸뚱이를 잇몸이 없는 시린 이빨로

물어뜯고 뜯어도 시대는 아파하지도 않고

우리들의 분도 풀어지지 않네

 

우리들을 위하여, 창작과비평사, 1976

 

 


 

최하림[崔夏林,1939.3.7 ~ 2010,4.22]  시인

1939년 전남 목포에서 출생.  196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貧弱한 올페의 回想〉이 당선되어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우리들을 위하여』, 『작은 마을에서』, 『겨울 깊은 물소리』,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 『굴참나무숲에서 아이들이 온다』, 『풍경 뒤의 풍경』, 『때로는 네가 보이지 않는다』와 시선집 『사랑의 변주곡』, 『햇볕 사이로 한 의자가』, 판화 시선집 『겨울꽃』, 자선 시집『침묵의 빛』 그리고 시전집 『최하림 시 전집』 등이 있음 그 밖에 미술 산문집 『한국인의 멋』, 김수영 평전『자유인의 초상』과 수필집 『숲이 아름다운 것은 그곳이 비어 있기 때문이다』, 최하림 문학산책 『시인을 찾아서』 등을 펴냄. 제11회 이산문학상,

제5회 현대불교문학상, 제2회 올해의 예술상 문학 부분 최우수상 수상. 전남일보 논설위원, 서울예술대학 교수 역임. 2010년 간암으로 他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