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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송수권 시인 / 춘향이 생각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4.

송수권 시인 / 춘향이 생각

 

 

앞산머리 자주빛 구름 옥색빛이 섞갈려 휘돌더니

그 빛 연한 솔잎마다 그늘지는 소리

산봉우리들도 수런수런 잔기침을 놓아

보기 좋은 달 하나 해산(解産)하고

몸을 푼다.

 

선한 눈, 코, 입, 짙은 숱, 눈썹

처음 눈 맞춘 죄로

옥사장 큰 칼을 쓰고 창틀을

넘어다볼 줄이야!

 

진개내 앞냇가에 개가 짖어 개가 짖어

은장도 날을 갈아

눈물에 띄운

달하

 

귀기서린 앞산 그리메

밤부엉이 울어쌓는데

구리 동전 녹슨 상평통보

몇 바리쯤 동헌 마루에 져다 부려야

이 몸 하나 평안하겠느냐? 평안하겠느냐?

 

한국대표시인100선집, 지리산 뻐꾹새, 미래사, 1991

 

 


 

 

송수권 시인 / 평사리행(平沙里行)

 

 

평사리의 섣달 어두운 하늘에 떠서

갈갈 울고 오는 기러기떼

쓸쓸한 바람 따라 이 들녘 끝

일렬횡대로 내리는 것 보니

그날, 봉준의 서상대(書床臺) 위에 떨어진

육효점괘 한번 보는 듯하군

 

진 날 갠 날 마른 땅을 골라

언제고 태평한 세월 평사낙안(平沙落雁)이야

따로 있었을까마는

이곳 촌로(村老)들의 말에 따르면

육효점괘 하나는 늘 입성이 나

경천, 경천을 조심하라고

그래서 봉준은 공주성을 칠 때도

노상 비실거리며 경천점(敬天店)을 겉돌기만 했던가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십이월 막소금 같은 눈발에 쫓기어 오다

피로리(避老里)의 한 주막집에 들러

그 경천(敬天)에게 참말 목을 졸릴 줄이야

피로리(避老里) 또한 피로하게 작부나 얻어 끼고

한세상 목마른 술이나 얻어 마실 땅인 것을

 

오늘 평사리 이 넉넉한 들을 빠져 나오며

역사는 이긴 자의 힘이고

패배자의 군소리라는 것을

저 들녘 끝 떠도는 쓸쓸한 바람이 일러 주었네.

 

한국대표시인100선집, 지리산 뻐꾹새, 미래사, 1991

 

  


 

송수권[宋秀權, 1940.3.15 ~ 2016.4.4]시인

1940년 전남 고흥에서 출생. 호는 평전(平田). 서라벌 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1975년 《문학사상》 신인상에 「山門에 기대어」 외 4편이 당선되어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제1시집 『산문(山門)에 기대어』(1980. 문학사상), 제2시집 『꿈꾸는 섬』(1982. 문학과지성사), 제3시집 『아도(亞陶)』(1985. 창작과비평사), 제4시집 『새야 새야 파랑새야(동학서사집)』(1986. 나남), 제5시집 『우리들의 땅』(1988. 문학사상), 제6시집 『자다가도 그대 생각하면 웃는다』(1991. 전원), 제7시집 『별밤지기』(1992. 시와시학사), 제8시집 『바람에 지는 아픈 꽃잎처럼』 (1994. 문학사상), 제9시집 『수저통에 비치는 노을』 (1998. 시와시학사), 제10

시집 『파천무』(2001. 문학과경계사), 제11시집 『언 땅에 조선매화 한 그루 심고』(2005. 시학사), 제12시집 장편서사시 『달궁 아리랑』(2010. 종려나무), 제13시집 『하늘을 나는 자전거』, 제14집 『빨치산』 등이 있음.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제1회 영랑시문학상(2003), 김달진 문학상, 서라벌문학상 등을 수상. 순천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