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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호승 시인 / 철원역에서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4.

정호승 시인 / 철원역에서

 

 

철원역에서 기차를 기다렸다

어느 겨울날

흰눈을 맞으며

원산을 떠나 서울로 가는

새벽 첫차를 기다렸다

죽은 들풀들이

죽어서 다시 사는 들녘에서

금강산 장안사로 간

아버지를 기다렸다

 

철원역에서 기차를 기다렸다

함박눈을 맞으며

서울을 떠나 원산으로 가는

밤열차를 기다렸다

월정역을 지나 평강역을 지나

원산에 내리면

지금 누가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

재두루미들이 무심히 사라진

하늘을 보며

언제나 그리운 그대를 생각했다

 

별들은 따뜻하다, 창작과비평사, 1990

 

 


 

 

정호승 시인 / 첨성대

 

 

할머님 눈물로 첨성대가 되었다.

일평생 꺼내보던 손거울 깨뜨리고

소나기 오듯 흘리신 할머니 눈물로

밤이면 나는 홀로 첨성대가 되었다.

 

한 단 한 단 눈물의 화강암이 되었다.

할아버지 대피리 밤새 불던 그믐밤

첨성대 꼭 껴안고 눈을 감은 할머니

수놓던 첨성대의 등잔불이 되었다.

 

밤마다 할머니도 첨성대 되어

댕기 댕기 꽃댕기 붉은 댕기 흔들며

별 속으로 달아난 순네를 따라

동짓날 흘린 눈물 북극성이 되었다.

 

싸락눈 같은 별들이 싸락싸락 내려와

첨성대 우물 속에 퐁당퐁당 빠지고

나는 홀로 빙빙 첨성대를 돌면서

첨성대에 떨어지는 별을 주웠다.

 

별 하나 질 때마다 한 방울 떨어지는

할머니 눈물 속 별들의 언덕 위에

버려진 버선 한 짝 남몰래 흐느끼고

붉은 명주 옷고름도 밤새 울었다.

 

여우가 아기 무덤 몰래 하나 파 먹고

토함산 별을 따라 산을 내려와

첨성대에 던져 논 할머니 은비녀에

밤이면 내려앉는 산여우 울음 소리.

 

첨성대 창문턱을 날마다 넘나드는

동해바다 별 재우는 잔물결 소리.

첨성대 앞 푸른 봄길 보리밭길을

빚쟁이 따라가던 송아지 울음 소리.

 

빙빙 첨성대를 따라 돌다가

보름달이 첨성대에 내려앉는다.

할아버진 대지팡이 첨성대에 기대놓고

온 마을 석등마다 불을 밝힌다.

 

할아버지 첫날밤 켠 촛불을 켜고

첨성대 속으로만 산길 가듯 걸어가서

나는 홀로 별을 보는 일관(日官)이 된다.

 

지게에 별을 지고 머슴은 떠나가고

할머닌 소반에 새벽별 가득 이고

인두로 고이 누빈 베동정 같은

반월성 고갯길을 걸어오신다.

 

단오날 밤

그네 타고 계림숲을 떠오르면

흰 달빛 모시치마 홀로 선 누님이여.

오늘밤 어머니도 첨성댈 낳고

나는 수놓은 할머니의 첨성대가 되었다.

할머니 눈물의 화강암이 되었다.

 

슬픔이 기쁨에게, 창작과비평사, 1979

 

 


 

 

정호승 시인

1950년 대구에서 태어나 경희대 국문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했다. 197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석굴암을 오르는 영희>가,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 <첨성대>가,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위령제>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슬픔이 기쁨에게》 《서울의 예수》《새벽편지》 등이, 시선집으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흔들리지 않는 갈대》 등이, 어른이 읽는 동화로 《연인》《항아리》《모닥불》《기차 이야기》 등이, 산문집 《소년부처》 등이 있다. <소월시문학상> <동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