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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 시인 / 오월은 내게
오월은 내게 사랑을 알게 했고 달뜨는 밤의 설레임을 알게 했다 뻐꾹새 소리의 기쁨을 알게 했고 돌아오는 길의 외로움에 익게 했다 다시 오월은 내게 두려움을 가르쳤다 저자거리를 메운 군화발소리 총칼소리에 산도 강도 숨죽여 웅크린 것을 보았고 붉은 피로 물든 보도 위에서 신조차 한숨을 쉬는 것을 나는 보았다 마침내 오월에 나는 증오를 배웠다 불없는 지하실에 주검처럼 처박혀 일곱 밤 일곱 낮을 이를 가는 법을 배웠다 원수들의 이름 손바닥에 곱새기며 그 이름 위에 칼날을 꽂는 꿈을 익혔다 그리하여 오월에 나는 복수의 기쁨을 알았지만 찌른 만큼 찌르고 밟힌 만큼 밟는 기쁨을 배웠지만 오월은 내게 갈 길을 알게 했다 함께 어깨를 낄 동무들을 알게 했고 소리쳐 부를 노래를 알게 했다
난한 사랑노래, 실천문학사, 1988
신경림 시인 / 오지일기(奧地日記)
거리에는 아직 가을볕이 따가웠다. 수수밭에 바람이 일고 미류나무가 누렇게 퇴색해도 활석광산으로 가는 트럭이 온 읍내를 먼지로 뒤덮는 추분.
그 탁한 먼지 속에서 나는 한 여자를 알게 되었다. 우리는 사랑을 하게 되었나보다 지치고 맥빠진 그 따분한 사랑을.
사과가 익는 과수원을 돌아 거기 연못을 찾아가면 여자는 이내 말을 잃고 나는 그 곁에서 쓴 막소주를 마셨다.
어디에도 내 친구들은 없었다. 연못 위에는 낮달이 떴으나 떠도는 것은 숱한 원귀들뿐이었다. 여자는 더욱 말을 잃었지만
삶은 갈수록 답답하고 가을이 와도 읍내는 온통 먼지로 뒤덮였다. 물가 술집 마루에 와 앉으면 참빗장수들 구성진 노랫가락 물바람 타고 오고
바라보면 멀리 뻗친 고갯길 타박대는 외지 장꾼들 또 일소들. 여자의 치마에 개흙이 묻어 돌아오는 미류나무가 누렇게 퇴색한 언덕길에서
우리는 사랑을 하게 되었나보다 지치고 맥빠진 그 따분한 사랑을. 수수밭에 바람이 일고 추분이 와도 거리에도 지붕에도 간판에도 가슴에도 온통 뿌옇게 먼지만 쌓였다.
새재, 창작과비평사, 1979
신경림 시인 / 옥대문(玉大門)
하양병 던져라 열두 강 갈라지고 노랑병 던져라 불바다 재가 되네 열려라 돌대문 참칡 거적 위 내 아이들 무릎 안고 새벽잠이 든. 아이들 들쳐업고 열두 강을 건넜네 뇌성벽력 여우꾐에 혼이 빠져도 바위에 찢기고 가시에 긁히면서 빨강병 던졌네 불바다 다시 열어 파랑병 던졌네 열두 강 도로 막혀. 동네 밖에 금줄 쳐 잡귀 막아 놓고 닫혀라 옥대문 떡갈나무 밑 내 아이들 새소리에 눈뜨는 아침.
투전방 뒷전에서 빨강병을 얻었네 떠돌이 책전에서 파랑병을 얻었네 헐린 시골 정거장 대목밑 장날 눈먼 계집 장타령에 노랑병을 얻었네. 강물을 가르고 불바다를 지나 돌대문 열고 가서 내 아이들 업었네. 닫혀라 옥대문 눈뜬 내 아이들 머리 한 올 바람조차 넘볼 수 없게.
새재, 창작과비평사,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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