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하림 시인 / 어머니 곁에 누우면
걸어갈거나, 오늘도 나는 걸어갈거나. 음산(陰散)한 바람은 버릇같이 나를 달래고 어느 한 곳에서도 지워지지 않는, 기러기떼처럼 하늘을 흔들며 가고 온종일 지저귀다가 보는 저녁 햇빛을 받은 떨어진 잎새의 흔적(痕迹)들 참 저녁 햇빛은 우리 것이다. 저녁 햇빛은 우리 것이다. 이렇게 피곤할 때면 나는 어머니 곁으로 가 누우리 그의 곁에 누우면 물소리 흐르는 나무들이며 이파리들이며 그리도 조용한 삼라만상이 내 생전 처음 내게 와서 소근대고, 나는 얼굴을 숙이고 나를 팔아먹은 여자 생각도 않고 부끄러운 신부(新婦)처럼 귀를 모으고, 흥건히 어깨 적시는 비여…… 공중에서 내리는 비여……
작은 마을에서, 문학과지성사, 1982
최하림 시인 / 영동(嶺東)
1
열 두 산을 너머 기차가 달리는 산골에는 눈이 많어, 사람들은 쿨룩거리며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아세티린 불빛이 가물거리는 갱도를 지나서, 검은 석탄을 지나서, 새들이 하늘에 매달리듯 띠엄띠엄 선 가로수들이 기슭에 매달리듯, 헬맷을 쓴 십장이 소리지르고 굴착기가 울고 흐르는 달같이, 내리치는 곡괭이와 함께 떠오르고 가라앉는다
적(敵)처럼 외로운 시대여, 내리쳐라 어둠이 무너져 별이 보일 때까지, 별의 정수리가 부서져 보석이 될 때까지
오늘밤에도 칼에 닫는 아이의 여린 살이 마취를 지나서 울부짖으며 떠오르고 꿈틀거리는 여인의 하체가 떠오르고
빛이 내리는 지하(地下) 일천 피트 어둠도 증오도 쓰러져 다시는 일어서지 못한다 일어서지 못한다
2
삶이 개만도 못한 무간지옥(無間地獄)을 빠져나와 아침, 북항(北港)을 지나가면 눈이 큰 수영(洙暎)을 닮은 사내가 북어를 메고 눈 속을 간다
벌거벗은 나무들이 열지어 서 있고 어디메선지 굶주린 짐승들이 울부짖는다 눈이 내려 쌓인다
아무래도 일이 일어나겠구나 은신할 곳도, 자작나무숲도 베허지고 멀리 저녁 종소리도 들리지 않겠구나
아아, 또 몸서리를, 쳐야겠구나.
작은 마을에서, 문학과지성사, 1982
|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신경림 시인 / 오월은 내게 외 2편 (0) | 2020.02.03 |
|---|---|
| 김백겸 시인 / 꽃들은 시간에 창백하게 말라가네 (0) | 2020.02.03 |
| 김신용 시인 / 연(鳶) (0) | 2020.02.03 |
| 송수권 시인 / 지리산 뻐꾹새 외 1편 (0) | 2020.02.03 |
| 우원호 시인 / 군자삼락(君子三樂)* 외 1편 (0) | 2020.02.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