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최하림 시인 / 어머니 곁에 누우면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3.

최하림 시인 / 어머니 곁에 누우면

 

 

걸어갈거나, 오늘도 나는 걸어갈거나.

음산(陰散)한 바람은 버릇같이 나를 달래고

어느 한 곳에서도 지워지지 않는,

기러기떼처럼 하늘을 흔들며 가고

온종일 지저귀다가 보는 저녁 햇빛을 받은

떨어진 잎새의 흔적(痕迹)들

참 저녁 햇빛은 우리 것이다. 저녁 햇빛은 우리 것이다.

이렇게 피곤할 때면 나는 어머니 곁으로 가 누우리 그의 곁에 누우면 물소리 흐르는 나무들이며 이파리들이며 그리도 조용한 삼라만상이 내 생전 처음 내게 와서 소근대고,

나는 얼굴을 숙이고

나를 팔아먹은 여자 생각도 않고

부끄러운 신부(新婦)처럼 귀를 모으고,

흥건히 어깨 적시는 비여……

공중에서 내리는 비여……

 

작은 마을에서, 문학과지성사, 1982

 

 


 

 

최하림 시인 / 영동(嶺東)

 

 

1

 

열 두 산을 너머 기차가 달리는 산골에는

눈이 많어, 사람들은 쿨룩거리며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아세티린 불빛이 가물거리는

갱도를 지나서, 검은 석탄을 지나서,

새들이 하늘에 매달리듯

띠엄띠엄 선 가로수들이

기슭에 매달리듯,

헬맷을 쓴 십장이

소리지르고 굴착기가 울고

흐르는 달같이, 내리치는

곡괭이와 함께

떠오르고 가라앉는다

 

적(敵)처럼 외로운 시대여, 내리쳐라 어둠이

무너져 별이 보일 때까지, 별의 정수리가

부서져 보석이 될 때까지

 

오늘밤에도 칼에 닫는 아이의 여린 살이 마취를 지나서

울부짖으며 떠오르고 꿈틀거리는

여인의 하체가 떠오르고

 

빛이 내리는 지하(地下) 일천 피트

어둠도 증오도 쓰러져

다시는 일어서지 못한다

일어서지 못한다

 

2

 

삶이 개만도 못한 무간지옥(無間地獄)을 빠져나와

아침, 북항(北港)을 지나가면 눈이 큰 수영(洙暎)을

닮은 사내가 북어를 메고 눈 속을 간다

 

벌거벗은 나무들이 열지어 서 있고

어디메선지 굶주린 짐승들이 울부짖는다 눈이 내려 쌓인다

 

아무래도 일이 일어나겠구나

은신할 곳도, 자작나무숲도 베허지고

멀리 저녁 종소리도 들리지 않겠구나

 

아아, 또 몸서리를, 쳐야겠구나.

 

작은 마을에서, 문학과지성사, 1982

 


 

최하림[崔夏林,1939.3.7 ~ 2010,4.22]  시인

1939년 전남 목포에서 출생.  196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貧弱한 올페의 回想〉이 당선되어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우리들을 위하여』, 『작은 마을에서』, 『겨울 깊은 물소리』,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 『굴참나무숲에서 아이들이 온다』, 『풍경 뒤의 풍경』, 『때로는 네가 보이지 않는다』와 시선집 『사랑의 변주곡』, 『햇볕 사이로 한 의자가』, 판화 시선집 『겨울꽃』, 자선 시집『침묵의 빛』 그리고 시전집 『최하림 시 전집』 등이 있음 그 밖에 미술 산문집 『한국인의 멋』, 김수영 평전『자유인의 초상』과 수필집 『숲이 아름다운 것은 그곳이 비어 있기 때문이다』, 최하림 문학산책 『시인을 찾아서』 등을 펴냄. 제11회 이산문학상,

제5회 현대불교문학상, 제2회 올해의 예술상 문학 부분 최우수상 수상. 전남일보 논설위원, 서울예술대학 교수 역임. 2010년 간암으로 他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