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지하 시인 / 둥글기 때문
거리에서 아이들 공놀이에 갑자기 뛰어들어 손으로 마구 공 주무르는 건 철부지여서가 아니야 둥글기 때문
거리에서 골동상 유리창 느닷없이 깨뜨리고 옛 항아리 미친 듯 쓰다듬는 건 훔치려는 게 아니야 이것 봐, 자넨 몰라서 그래 둥글기 때문
거리에서 노점상 좌판 위에 수북수북히 쌓아놓은 사과알 자꾸만 만지작거리는 건 아니야 먹고 싶어서가 아니야 돈이 없어서가 아니야 모난 것, 모난 것에만 싸여 살아 둥근 데 허천이 난 내 눈에 그저 둥글기 때문
거리에서 좁은 바지 차림 아가씨 뒷모습에 불현듯 걸음 바빠지는 건 맵시 좋아서가 아니야 반해서도 아니야 천만의 말씀 색골이어서는 더욱 절대 아니야 둥글기 때문
불룩한 젖가슴 도톰한 입술 새빨간 젖꼭지나 새빨간 연지 그 때문도 아니야 뚫어져라 끝내 마주 쳐다보는 건 모두 다 그건 딱딱한 데, 뾰족한 데 얻어맞고 찔려 산 내겐 환장하게 보드랍고 미치고 초치게 둥글기 때문
애린, 실천문학사, 1987
김지하 시인 / 뒷골목의 시궁창 까마귀 벌판
벌거벗은 내 생각의 새 뿌리가 자라는 곳 뒷골목의 시궁창 까마귀 벌판 진종일 이마 위를 얇은 생각의 삽질만이 스쳐 가는 자리 가슴의 뜀질마저 나직나직한 자리 아, 고름이 흘러 흘러 놀랄 때 놀라 깨어 외칠 때 나는 이미 옷이었다 횟대에 걸려 잠든 옷
눈초리는 눈초리대로 신문지는 신문지대로 소매 끝에 앞섶에 바지주름에 기어다니고 걷고 지껄이고 나빈 양 펄렁이는 옷 단 한 벌의 깨끗한 눈치 빠른 옷
땅거미가 지고 뒷짐을 지고 시뻘건 주둥이들 허옇게 웃는 뒷골목 가자 부산집으로 히히 웃으며 주물렁탕 하러 가자 나비들이 살풋 앉을 때 지분 냄새 콧가에 설핏 스칠 때 나는 이미 알몸이었다 주무르고 벗기고 악을 쓰고 빨고 핥고 나는 고름 담긴 술 한 잔의 고름
시궁창 속 얼굴이 달과 내 오줌에 맞아 깨어질 때 울다 칼부림하다 단 한 벌의 옷이 깨끗이 술값에 벗겨질 때 이마 깊이 찬바람이 와서 화살 되어 박힐 때 알몸에 알몸에 아아 고름이 흘러 벌거벗은 내 생각의 새 뿌리가 자라는 곳 뒷골목의 시궁창 까마귀 벌판.
타는 목마름으로, 창작과비평사, 1982
김지하 시인 / 또 남한강에서
춤추어라 애린 네 발끝 흰 눈부심 춤추어라
자작나무만 아니다 은사시나무 미류나무만 아니다 눈 내리는 겨울 모든 나무 모든 풀 돌마저도 하얗다 춤추어라
햇살 겨울 바람 없는 날 한낮 세상 온통 흰 햇살 속에 잠들 때 아아 흰빛 눈부시게 눈부시게 더욱 흰빛으로 애린 춤추어라 소복춤으로 흰빛을 딛고 얼음 사위로 얼음을 밟고 노을이 타도 새벽 푸르름이 와도 변함없는 흰빛 아아 흰빛
네 발끝 흰 눈부심으로 가볍게 흰빛을 딛고 춤추어라 애린 춤추어라
강가에 얼어붙은 겨울나무숲 배마저 얼어붙은 하얀 겨울강 그 얼음 위에 그 외로움 위에 춤추느냐 펄럭이는 옷자락 너 선혈아 사랑하는 애린 타오르는 타오르는 애잔한 노을 노을 내 애린의 얼굴.
애린, 실천문학사, 1987
김지하 시인 / 똥
똥 보면 베먹고 싶어 새벽 샘물 샘 뒤 어덩 위 산죽닢 스쳐 오는 바람을 마셔 동트는 분홍 산봉우리 흰 안개구름 마셔 똥만 보면 못 견디게 베먹고 싶어 내 몸이 곧 흙이어설 게야 흙이 똥을 마다 안함 오곡이 장차 가득가득히 익어 끝내는 열매 열리게 될 터이어설 게야 똥 속에서 배시시 애린이 웃어설 게야 꼭 그럴 게야.
애린, 실천문학사, 1987
김지하 시인 / 만남
밤이라도 이리 깊으면 밤이라 할 수 없겠지
앞길 뒷길 다 끊긴 곳에
문득 노여움처럼 난데없는 희망 한 오리.
별밭을 우러르며, 동광출판사, 1989
김지하 시인 / 매장
번개와 폭풍의 밤에 스물일곱 해의 굶주림의 곤혹에 가장 모질은 돌밭에 삽질을 한다 너는 그것을 원했다 빈손으로 일군 땅 네 피가 아직 더운 흙가슴의 모진 곳 좌절당한 반역의 이 불밭에 운명에 너를 묻기 위해 뜬눈의 주검 더없이 억센 뜬눈의 주검 염도 새끼줄도 관조차도 없다 네겐 한 권의 함석헌과 한 송이의 박꽃뿐 너는 그것을 원했다 황량한 옥금리 들녘 황토로 변하기를 너는 원했다 볕에 타고 거친 바람에 시달려 끝끝내 빛나기를, 끝끝내 흔들리기를 성장의 밑바닥에 타오르기를 죽음 속에서도 붉게 타는 뜬눈의 치열한 핏발 내 가슴속에 쟁쟁히 울리는 그 굵은 목소리 아직도 더운 흙가슴에 살아 있는 너 살아있는 반역의 이 불밭에 운명에 삽질을 한다 너를 묻기 위해 번개와 폭풍의 밤에 통곡하며 통곡하며 나는 삽질을 한다.
황토, 한얼문고, 1970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석민재 시인 / 개 좀 빌려줘 봐 (0) | 2020.02.04 |
|---|---|
| 송수권 시인 / 춘향이 생각 외 1편 (0) | 2020.02.04 |
| 권민경 시인 / 무게 (0) | 2020.02.04 |
| 정호승 시인 / 철원역에서 외 1편 (0) | 2020.02.04 |
| 강기원 시인 / 비밀 정원 외 1편 (0) | 2020.02.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