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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정환 시인 / 바퀴벌레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10.

김정환 시인 / 바퀴벌레

 

 

바퀴벌레 한 마리가 천정에서 떨어져

무참히 잠든 내 영혼의 이마를 때린다

달아난다, 잡히지 않으려고

바퀴벌레도 아닌 밤중, 바퀴벌레는 그도 홀로 깜깜해

저는 반짝이는

슬픔이라는 듯이

고요하고 그러나 억센

털난 다리로 씩씩거리며

달아난다

소스라쳐 내가 놀라는 것은

아직도 내게 돌려줄 것이 많기 때문이다 소름끼치는

동산 부동산.

바퀴벌레는 내 이마에서 떨어져

털난 다리는 갑자기 커 보이고

내 몸통보다도 커진 다리의 근육이

무식하게 일자무식하게

내 신혼의 벽지 위를 짓누르고 다닌다

어떤 소중한 두려움 같은

그러나 그 자체로는 슬픈

흉악한 사랑의 깜깜 절벽

소름끼칠 여유도 주지 않는

그러나 바퀴벌레는 숨가쁜 진실이다

 

지울 수 없는 노래, 창작과비평사, 1982

 

 


 

 

김정환 시인 / 비 노래

 

 

하필이면

하필이면 이런 날 비가 와서

나는 저 비인 개천에 당장

붉덩물 흘러 넘치는 것 봅니다

비에 씻겨지면서 바라봅니다

홍수에 넘치는 사랑 속에서

아우성과 이름모를 울부짖음과

인파의 아비규환 속에서

거품의 이빨과, 회오리바람과 소용돌이가 씻겨져 내리고

그날 그 우뢰 같던 함성소리가

씻겨져 내리는 소리 들립니다

말하시오 무엇이 우리를

죽어 피 토하며 배앝은

한 떨기 꽃이 되게 합니까

그리고 누가 이렇게 늦은 4월에 살아 남아

살아 남은 한 떨기 꽃을 바치게 합니까

무덤 앞에 꽃을  드리는 여인의 머리카락이 비에 젖습니다

이런 날 다시 내리는 비는

이젠 적셔줄 것입니다. 우리의 가난과

투명한 아픔과

희망의 뿌리를

젖은 생선같이 싱싱한

우리네 삶의 뿌리.

흐느끼지 마시오

눈물은 더 이상 아무도 잠재워주지 못합니다

 

좋은 꽃, 민음사, 1985

 

 


 

 

김정환 시인 / 사랑과 투쟁은 둘이 아니다

 

 

물론 그렇지 단순한 모순은 우리가

자본주의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만든다 그렇다

자본주의는 복잡하다

그러나 단순성에는 반동적인 것과

혁명적인 단순성이 있다 요는

단순성에도 계급성이 있다

이를테면 그것은 태권V와 외계 로보트의 싸움이 아니다

자본가는 괘씸해서, 나쁜 편이라서 단순한 것이 아니고

노동자는 선량해서 단순한 것이 아니다

노동자는 독점자본의 노동력이므로

자본보다 엄혹하고

노동자는 독점자본의 파괴자이므로

자본보다 강하다

그리고 노동자는 더 나은 세상의 건설자이므로

이미 사랑과 투쟁은 둘이 아니다

그것은 단순하기보다는 기본적이고

이를테면 지는 해와

찬란한 완성의 단순함이다

 

기차에 대하여, 창작과비평사, 1990

 

 


 

김정환(金正煥, 1954년 ~ ) 시인

서울에서 출생하였고,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1980년 《창작과 비평》에 시 〈마포강변 동내에서〉 등이 추천되어 등단. 주요 작품으로 〈해방 서시〉,〈유채꽃밭〉 등이 있으며 시집으로 《황색예수》,《지울 수 없는 노래》,《좋은 꽃》 등이 있다. 시대의 진실을 밝혀내려는 결의와 열린 감성으로 우리 시대의 언어에 일대 변혁을 몰고 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시를 폭포처럼 쏟아”낸다는 평을 받을 정도로 다작하는 시인이다. 2007년 시집 《드러남과 드러냄》으로 제9회 백석문학상을 받았고 2009년에는 제8회 아름다운 작가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