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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시인 / 소를 논함
소가 아니면 소가 아닐세 이중섭이 소는 조선 소가 아닐세 조선 소 아니면 소 그림 안되는 법 조선엔 자고로 미친 소 없네 얼룩소 수입소 물론 코뿔소 사람 무는 소 사람 들이받는 소 노기등등 분기탱천하는 소 뼈만 남은 이중섭이 소 절간에서 소소소소소 하는 그런 소 거 다 소 아닐세 조선 소 조선놈 닮아 어질고 에미령하고 때려도 밟아도 치고 차고 패도 그저 끄덕끄덕 일하는 소 갈 데 없는 그 소 그것이 소 조선엔 자고로 미친 소 없네 우황 들어 앓긴 해도 미치는 일 따윈 아예 없어 천만의 말씀, 뼈만 남은 소라니! 소 죽어 뼈는 커녕 터럭 한 올 남기는 걸 본 일 있던가 없어 다 주고 가지 가죽은 가죽대로 꼬리는 꼬리대로 다 먹어라 주고 가지 없어 없다니까 그게 소여 조선 소 조선 소가 소여.
애린, 실천문학사, 1987
김지하 시인 / 소를 보다
꾀꼬리 나무에 앉아 꾀꼴꾀꼴 우는데 봄날 산들바람에 버들가지 하늘거리네 이제는 한 걸음도 물러설 수 없는 곳에 한량없는 소 모습을 무엇으로 그려낼꼬 ―소노래 셋째
천구백칠십구년 겨울 난데없는 꾀꼬리 울음 소리 `머리 고옵게 빗고 시집가고지고!'
애린2, 실천문학사, 1987
김지하 시인 / 소를 찾아 나서다
우거진 풀 헤치며 아득히 찾아가니 물은 넓고 산은 멀어 갈수록 험하구나 몸은 고달프고 마음은 지쳐도 찾을 길 없는데 저문 날 단풍숲에서 매미 울음 들려오네 ―열 가지 소노래 첫째
네 얼굴이 애린 네 목소리가 생각 안 난다 어디 있느냐 지금 어디 기인 그림자 끌며 노을진 낯선 도시 거리 거리 찾아 헤맨다 어디 있느냐 지금 어디 캄캄한 지하실 시멘트벽에 피로 그린 네 미소가 애린 네 속삭임 소리가 기억 안 난다 지쳐 엎드린 포장마차 좌판 위에 타오르는 카바이드 불꽃 홀로 가녀리게 애잔하게 가투 나선 젊은이들 노래 소리에 흔들린다.
애린, 실천문학사, 1987
김지하 시인 / 속 1
이리 괴로운 건 옛일 때문이다 옛일에의 집착 때문
한번 놓자 놓아버리니 먼 곳에서 희미한 고물장수 가윗소리.
별밭을 우러르며, 동광출판사, 1989
김지하 시인 / 안산
저녁 무렵 여기 서서 보니 쇠창살 너머로 보니 피 흐르는 노을 인왕산을 넘어 노을에 찢긴 안산 피 인왕산을 넘어 내리 쏟아져 몰려가는 걸 보니 오른손도 왼손도 닿지 않는 내 등 한복판에 꽂힌 칼 칼이 밀어 노을에 노여움도 설움도 막지 못해 흐르는 내 가슴의 끝없는 새 피 피가 밀어 노을에 한 걸음 또 한 걸음 인왕산을 넘어 내리 엎으러져 몰려가는 내 마음속 부릅뜬 이괄의 두 눈 타는 핏발 외치는 이귀 저 쌔하얀 이빨을 보니 변함없는 것 되풀이되는 것 작은 풀씨 속에 초원이 자라는 것 좁은 빈틈에서 폭풍이 터져나오는 것 가마 한 채 말 한 필 겨우 다닐똥 말똥 좁아터진 길마재 외길에 서울 온 목숨이 달렸던 걸 보니 안산 노을을 여기 서서 보니 쇠창살 너머로 치어다보니.
애린, 실천문학사, 1987
김지하 시인 / 안팎
1
새 속에서 묶인 내가 날으는 새 본다 노을로 타는 새 나 본다 핏발로 타는 내 눈 속에서 노을로 타는 날으는 묶인 새 본다 내가 끝끝내 나팔 소리 울리면 스러져갈 새.
2
참새라면 쥐라면 파리 모기 빈대라면 풀 돌 물 연기 구름이라면 한줌 흙이라면 차라리 아예 태어나지 말았더라면 태어나도 노을진 어느 보리밭 가녘 귀 떨어진 돌부처로 모로 누웠더라면 일그러진 오지그릇 속 텅 빈 기다림으로나 기다림으로나 거기서 항시 멈췄더라면 차라리 먼저 간 벗 가느다란 그 한 올 머리카락이었더라면.
3
입 안에 신침 괴는 날은 틀림없이 귤 넣어주셨고 발 시리다 싶은 날은 어김없이 털양말 넣어주셨다 면회는 한 달에 단 한 번 편지는 써본 일도 받은 일도 없는 긴 세월 내 몸과 당신 몸 바꾸어 어머니는 부처 이루셨나.
4
얘야 괜찮다 교도소 벽돌담 위에 풀꽃님도 피시니 괜찮다 건너편 병식님 계시던 방 창살 사이 가죽나무님도 자라신다 아주 괜찮다 아침엔 참새님 와서 악쓰시고 저녁엔 쥐님 와서 춤추시고 이 빈대 모기 파리 구더기님도 계신다 옆방에 그 옆방에 도둑님들 잔뜩 계시고 황공하옵게도 내 앞엔 간수님도 한 분 계신다 괜찮다 얘야 이만하면 견딜 만하니 염려하지 마라 네 하느님께도 그렇게 말씀 올려라.
5
벽 속에 누군가 누워 있는데 거기 내가 누워 있는데 창살 너머 민들레씨 가득히 날고 마룻장에 깊이 새긴 빈 장기판 밖에서 소리 없이 온종일을 누군가가 걷고 있는데 내 속에 걷고 있는데 내가 그 속에 걷고 있는데.
애린, 실천문학사,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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