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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지하 시인 / 소를 논함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10.

김지하 시인 / 소를 논함

 

 

소가 아니면 소가 아닐세

이중섭이 소는 조선 소가 아닐세

조선 소 아니면 소 그림 안되는 법

조선엔 자고로 미친 소 없네

얼룩소 수입소 물론 코뿔소

사람 무는 소 사람 들이받는 소

노기등등 분기탱천하는 소

뼈만 남은 이중섭이 소

절간에서 소소소소소 하는 그런 소

거 다 소 아닐세

조선 소

조선놈 닮아 어질고 에미령하고

때려도 밟아도 치고 차고 패도 그저

끄덕끄덕 일하는 소

갈 데 없는 그 소

그것이 소

조선엔 자고로 미친 소 없네

우황 들어 앓긴 해도

미치는 일 따윈 아예 없어

천만의 말씀, 뼈만 남은 소라니!

소 죽어 뼈는 커녕

터럭 한 올 남기는 걸 본 일 있던가

없어

다 주고 가지

가죽은 가죽대로

꼬리는 꼬리대로 다 먹어라 주고 가지

없어

없다니까

그게 소여 조선 소

조선 소가 소여.

 

애린, 실천문학사, 1987

 

 


 

 

김지하 시인 / 소를 보다

 

 

  꾀꼬리 나무에 앉아 꾀꼴꾀꼴 우는데

  봄날 산들바람에 버들가지 하늘거리네

  이제는 한 걸음도 물러설 수 없는 곳에

  한량없는 소 모습을 무엇으로 그려낼꼬

      ―소노래 셋째

 

천구백칠십구년 겨울 난데없는 꾀꼬리 울음 소리

`머리 고옵게 빗고 시집가고지고!'

 

애린2, 실천문학사, 1987

 

 


 

 

김지하 시인 / 소를 찾아 나서다

 

 

  우거진 풀 헤치며 아득히 찾아가니

  물은 넓고 산은 멀어 갈수록 험하구나

  몸은 고달프고 마음은 지쳐도 찾을 길 없는데

  저문 날 단풍숲에서 매미 울음 들려오네

      ―열 가지 소노래 첫째

 

네 얼굴이

애린

네 목소리가 생각 안 난다

어디 있느냐 지금 어디

기인 그림자 끌며 노을진 낯선 도시

거리 거리 찾아 헤맨다

어디 있느냐 지금 어디

캄캄한 지하실 시멘트벽에 피로 그린

네 미소가

애린

네 속삭임 소리가 기억 안 난다

지쳐 엎드린 포장마차 좌판 위에

타오르는 카바이드 불꽃 홀로

가녀리게 애잔하게

가투 나선 젊은이들 노래 소리에 흔들린다.

 

애린, 실천문학사, 1987

 

 


 

 

김지하 시인 / 속 1

 

 

이리 괴로운 건 옛일 때문이다

옛일에의 집착 때문

 

한번 놓자

놓아버리니

먼 곳에서 희미한 고물장수 가윗소리.

 

별밭을 우러르며, 동광출판사, 1989

 

 


 

 

김지하 시인 / 안산

 

 

저녁 무렵

여기 서서 보니

쇠창살 너머로 보니

피 흐르는 노을 인왕산을 넘어

노을에 찢긴 안산 피

인왕산을 넘어

내리 쏟아져 몰려가는 걸 보니

오른손도 왼손도

닿지 않는 내 등 한복판에 꽂힌 칼

칼이 밀어 노을에

노여움도 설움도

막지 못해 흐르는 내 가슴의 끝없는 새 피

피가 밀어 노을에

한 걸음 또 한 걸음

인왕산을 넘어

내리 엎으러져 몰려가는 내 마음속

부릅뜬 이괄의 두 눈 타는 핏발

외치는 이귀 저 쌔하얀 이빨을 보니

변함없는 것

되풀이되는 것

작은 풀씨 속에 초원이 자라는 것

좁은 빈틈에서 폭풍이 터져나오는 것

가마 한 채 말 한 필 겨우

다닐똥 말똥 좁아터진 길마재 외길에

서울 온 목숨이 달렸던 걸 보니

안산 노을을

여기 서서 보니

쇠창살 너머로 치어다보니.

 

애린, 실천문학사, 1987

 

 


 

 

김지하 시인 / 안팎

 

 

1

 

새 속에서 묶인 내가

날으는 새 본다

노을로 타는 새 나 본다

핏발로 타는 내 눈 속에서 노을로 타는

날으는 묶인 새 본다

내가 끝끝내

나팔 소리 울리면 스러져갈

새.

 

2

 

참새라면 쥐라면 파리 모기 빈대라면

풀 돌 물 연기 구름이라면

한줌 흙이라면

차라리 아예 태어나지 말았더라면

태어나도 노을진 어느 보리밭 가녘

귀 떨어진 돌부처로 모로 누웠더라면

일그러진 오지그릇 속

텅 빈 기다림으로나 기다림으로나

거기서 항시 멈췄더라면

차라리

먼저 간 벗

가느다란 그 한 올

머리카락이었더라면.

 

3

 

입 안에 신침 괴는 날은 틀림없이

귤 넣어주셨고

발 시리다 싶은 날은 어김없이

털양말 넣어주셨다

면회는 한 달에 단 한 번

편지는 써본 일도 받은 일도 없는 긴 세월

내 몸과 당신 몸 바꾸어

어머니는 부처 이루셨나.

 

4

 

얘야

괜찮다

교도소 벽돌담 위에 풀꽃님도 피시니 괜찮다

건너편 병식님 계시던 방 창살 사이

가죽나무님도 자라신다 아주 괜찮다

아침엔 참새님 와서 악쓰시고

저녁엔 쥐님 와서 춤추시고

이 빈대 모기 파리 구더기님도 계신다

옆방에 그 옆방에 도둑님들 잔뜩 계시고

황공하옵게도 내 앞엔 간수님도 한 분 계신다

괜찮다

얘야

이만하면 견딜 만하니

염려하지 마라

네 하느님께도

그렇게 말씀 올려라.

 

5

 

벽 속에 누군가 누워 있는데

거기 내가 누워 있는데

창살 너머 민들레씨 가득히 날고

마룻장에 깊이 새긴 빈 장기판

밖에서 소리 없이

온종일을 누군가가 걷고 있는데

내 속에 걷고 있는데

내가 그 속에 걷고 있는데.

 

애린, 실천문학사, 1987

 

 


 

김지하(金芝河, 1941~) 시인

1941년 전남 목포에서 출생. 서울대 미학과를 졸업. 1969년 『시인』지에 「황톳길」등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는 『황토』, 『타는 목마름으로』, 『오적』, 『애린』, 『검은산 하얀 방』, 『이 가문 날의 비구름』, 『별밭을 우러르며』, 『중심의 괴로움』, 『화개』 등이 있고, 『밥』, 『남녘땅 뱃노래』, 『살림』, 『생명』, 『생명과 자치』, 『사상기행』, 『예감에 가득 찬 숲그늘』, 『옛 가야에서 띄우는 겨울편지』, 대설(大說)『남』, 『김지하 사상전집 (전3권)』, 『김지하의 화두』 등 다수의 저서를 출간. 아시아, 아프리카 작가 회의 로터스 특별상(1975),  국제시인회의 위대한 시인상 (1981), 크라이스키 인권상(1981) 등과 이산문학상 (1993), 정지용문학상 (2002), 만해문학상(2002), 대산문학상(2002) 등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