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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윤이 시인 / 여자, 유리디체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10.

김윤이 시인 / 여자, 유리디체

 

 

 여긴 무덤 혹은 방인가요. 어둠이 달라붙어 흑단 머리칼이 됩니다. 엉킨 다리가 풀리고 당신이 몸을 떼자, 헌칠한 그림자가 바짝 뒤쫓아요. 원(遠)에서 근(近)으로 나타나는가싶더니 근에서 원으로 크게 변합니다. 그림자가 덥석 손잡습니다. 제 외로움을 잡아당기네요. 오르페 뒤 유리디체만큼 절 닮은 사람도 없어 보이는군요. 당신과의 거리가 좁혀지지 않으니 방은 신화의 형상을 갖춰갑니다. 왠지 당신은 오르페처럼 장난질치는 운명을 벗어날 거라고도 생각해요. 젖 물리는 여자처럼 날 따뜻이 품으리라고도 생각하죠. 무엇이 우리 명(命)을 다하게 하나요. 둥근 해가 몸을 뚫고 들어옵니다. 뜨거워요. 꽃이 찢어지고 잎이 돋고. 어련히 알아서 하실 테지만, 혹여 뒤돌아보진 마세요.

 

 해 지고 별 돋아도 당신 끝내 보이질 않네요. 유리디체 비명만 들려요. 피골이 상접한 나목도 제 속엔 이파리의 진동이 사는 것을, 천 갈래 만 갈래 생각을 쟁이고 뿌리로 뻗치느라 도통 저인지 목소리조차 알아듣지 못하겠어요. 순명하는 사랑은 없다면서 시계침은 저같이 여지없이 고꾸라집니다. 남근과 여근은 운명에 갇힙니다. 아무려나, 끝난 날 뒤돌아보지 마세요. 사랑은 떠났고 방은 신화의 형상을 감춰갑니다. 그러할 제, 나목은 뿌리로부터 빨아올려 일제히 꽃이 찢어지고 잎이 돋고,

 

불타오른 생각은 육탈이 다되도록 뜨거운 법이지요.

 

월간『시인동네』 2017년 9월호 발표

 

 


 

 

김윤이 시인 / 다시없을 말

-H에게

 

 

그대여, 두 번 다시… 당신을 느낄 수 없을 테니 천천히… 써내려가야 합니다… 날 저물도록 날 배회한 곤혹스런… 방황만 맴돌지라도 마음을 숨겨두었을 사랑 참, 어지간합니다… 청춘은 간곳없고… 초라한 편지가 제 모습입니다만… 대낮의 정사처럼 심장이 멎어도… 고생깨나 하였던 나 감출 수 있어요… 이제부터 햇수로 수년 늙혀버린 제 사랑은… 이(李) 혹은 임(林)일지도 모를 비존칭이 될 겁니다… 겉봉으로 제가 비치는 듯하나… 구깃구깃 숨겨둔 제게서 눈돌려버립니다… 흰 거 희다 않고 글 검다 않으며… 망자의 삶처럼 감출 수 있어요… 먼젓번은 당신이 살구꽃 핀 야산에 가 종적 묘연한… 절 찾을까싶어… 꽃 누른 압지에 뜨거이 근황을 써 내려갔네요… 열두 자는 실히… 되어 보이는 꽃나무를 타고… 가운뎃손가락으로 집은 꽃의 음핵마저… 바람 편에 보내드렸습니다… 꽃바람 다하도록 불었으니… 아무리 멀더라도… 편지는 계신 곳을 잘 찾아냈을 겁니다… 한편으론… 한줄기 등불인 사랑을 숨지게 하고도… 날 잡아잡수 하는 속죄의 철면피입니다만… 한편으론… 범행을 저지른… 죗값으로 가쁜 호흡입니다…

 

내려앉고… 다시 올라가는 하늘의 형상은 무엇입니까… 사랑은요, 대체 무엇입니까… 한 손엔 편지를… 말끄러미 들여다보다, 뜬금없는 제 질문으로… 둘러싸인 꽃덤불에서 멈춰 서셨습니까… 답신은 도착했으리라 생각합니다… 꽃에 오예(汚穢)가 끼었다… 마시고, 살펴 주십시오…

 

구시월 어디에선가… 한 선생님이 어려운 건 없느냐 물으셨습니다… 지금껏 내 생에 없던 말이… 온통 절 휘저어 깡그리 제가 파헤쳐져… 그리하여 생각에 말이 얹히고, 어려움을 되뇌다… 멈췄습니다… 생각의 계단을 한 발 한 발 내딛을 때… 돌같이 굳힌 잊겠단 다짐이… 실상은 툭 치면 분질러질… 울음보였단 걸 알았습니다… 당신이 절 못 잊고 살면 어쩌는가 싶은 기우로… 전 꿈의 세상을 뒤집어썼단 걸 알았습니다… 꽃밭의 잔해들처럼 불도저로 밀린 공터가 보입니다… 도통 뭣도 없는 천지사방이 보입니다… 어려운 건 없느냐… 왜 누가 마음을 콕 찔러 물었을까… 그 약이 약발로 쓰고 역해서… 쉬 넘기지 못합니다… 두 뺨만큼은 티내지 않으려 했는데… 억척 떤 제가 눈에 밟혀 애써 물어주는 말… 어려운 건 없느냐에 두엄밭처럼 어둡습니다… 그곳에서… 어려운 일은 없으십니까… 제 분으로 생을 사는 참 가엾고 못난 저여서… 침을 삼키고 속에 숨겼을 법한… 말을 다시 가둡니다… 당신

 

계간 『시산맥』 2018년 겨울호 발표

 

 


 

김윤이 시인

1976년 서울에서 출생. 200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트레이싱페이퍼〉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흑발 소녀의 누드 속에는』(창비, 2011),  『독한 연애』(문학동네, 2015), 『다시없을 말』(문학수첩, 2019)가 있음. 웹진 『시인광장』 편집장 역임. 현재 〈시힘〉동인으로 활동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