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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이 시인 / 여자, 유리디체
여긴 무덤 혹은 방인가요. 어둠이 달라붙어 흑단 머리칼이 됩니다. 엉킨 다리가 풀리고 당신이 몸을 떼자, 헌칠한 그림자가 바짝 뒤쫓아요. 원(遠)에서 근(近)으로 나타나는가싶더니 근에서 원으로 크게 변합니다. 그림자가 덥석 손잡습니다. 제 외로움을 잡아당기네요. 오르페 뒤 유리디체만큼 절 닮은 사람도 없어 보이는군요. 당신과의 거리가 좁혀지지 않으니 방은 신화의 형상을 갖춰갑니다. 왠지 당신은 오르페처럼 장난질치는 운명을 벗어날 거라고도 생각해요. 젖 물리는 여자처럼 날 따뜻이 품으리라고도 생각하죠. 무엇이 우리 명(命)을 다하게 하나요. 둥근 해가 몸을 뚫고 들어옵니다. 뜨거워요. 꽃이 찢어지고 잎이 돋고. 어련히 알아서 하실 테지만, 혹여 뒤돌아보진 마세요.
해 지고 별 돋아도 당신 끝내 보이질 않네요. 유리디체 비명만 들려요. 피골이 상접한 나목도 제 속엔 이파리의 진동이 사는 것을, 천 갈래 만 갈래 생각을 쟁이고 뿌리로 뻗치느라 도통 저인지 목소리조차 알아듣지 못하겠어요. 순명하는 사랑은 없다면서 시계침은 저같이 여지없이 고꾸라집니다. 남근과 여근은 운명에 갇힙니다. 아무려나, 끝난 날 뒤돌아보지 마세요. 사랑은 떠났고 방은 신화의 형상을 감춰갑니다. 그러할 제, 나목은 뿌리로부터 빨아올려 일제히 꽃이 찢어지고 잎이 돋고,
불타오른 생각은 육탈이 다되도록 뜨거운 법이지요.
월간『시인동네』 2017년 9월호 발표
김윤이 시인 / 다시없을 말 -H에게
그대여, 두 번 다시… 당신을 느낄 수 없을 테니 천천히… 써내려가야 합니다… 날 저물도록 날 배회한 곤혹스런… 방황만 맴돌지라도 마음을 숨겨두었을 사랑 참, 어지간합니다… 청춘은 간곳없고… 초라한 편지가 제 모습입니다만… 대낮의 정사처럼 심장이 멎어도… 고생깨나 하였던 나 감출 수 있어요… 이제부터 햇수로 수년 늙혀버린 제 사랑은… 이(李) 혹은 임(林)일지도 모를 비존칭이 될 겁니다… 겉봉으로 제가 비치는 듯하나… 구깃구깃 숨겨둔 제게서 눈돌려버립니다… 흰 거 희다 않고 글 검다 않으며… 망자의 삶처럼 감출 수 있어요… 먼젓번은 당신이 살구꽃 핀 야산에 가 종적 묘연한… 절 찾을까싶어… 꽃 누른 압지에 뜨거이 근황을 써 내려갔네요… 열두 자는 실히… 되어 보이는 꽃나무를 타고… 가운뎃손가락으로 집은 꽃의 음핵마저… 바람 편에 보내드렸습니다… 꽃바람 다하도록 불었으니… 아무리 멀더라도… 편지는 계신 곳을 잘 찾아냈을 겁니다… 한편으론… 한줄기 등불인 사랑을 숨지게 하고도… 날 잡아잡수 하는 속죄의 철면피입니다만… 한편으론… 범행을 저지른… 죗값으로 가쁜 호흡입니다…
내려앉고… 다시 올라가는 하늘의 형상은 무엇입니까… 사랑은요, 대체 무엇입니까… 한 손엔 편지를… 말끄러미 들여다보다, 뜬금없는 제 질문으로… 둘러싸인 꽃덤불에서 멈춰 서셨습니까… 답신은 도착했으리라 생각합니다… 꽃에 오예(汚穢)가 끼었다… 마시고, 살펴 주십시오…
구시월 어디에선가… 한 선생님이 어려운 건 없느냐 물으셨습니다… 지금껏 내 생에 없던 말이… 온통 절 휘저어 깡그리 제가 파헤쳐져… 그리하여 생각에 말이 얹히고, 어려움을 되뇌다… 멈췄습니다… 생각의 계단을 한 발 한 발 내딛을 때… 돌같이 굳힌 잊겠단 다짐이… 실상은 툭 치면 분질러질… 울음보였단 걸 알았습니다… 당신이 절 못 잊고 살면 어쩌는가 싶은 기우로… 전 꿈의 세상을 뒤집어썼단 걸 알았습니다… 꽃밭의 잔해들처럼 불도저로 밀린 공터가 보입니다… 도통 뭣도 없는 천지사방이 보입니다… 어려운 건 없느냐… 왜 누가 마음을 콕 찔러 물었을까… 그 약이 약발로 쓰고 역해서… 쉬 넘기지 못합니다… 두 뺨만큼은 티내지 않으려 했는데… 억척 떤 제가 눈에 밟혀 애써 물어주는 말… 어려운 건 없느냐에 두엄밭처럼 어둡습니다… 그곳에서… 어려운 일은 없으십니까… 제 분으로 생을 사는 참 가엾고 못난 저여서… 침을 삼키고 속에 숨겼을 법한… 말을 다시 가둡니다… 당신
계간 『시산맥』 2018년 겨울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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