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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환 시인 / 서시
그대는 살과 뼈와 피비린 인간의 모습. 인간됨의 가장 비참한 모습. 사람들은 믿지 않는다 그대는 하늘 그냥 늘 푸른 하늘일 뿐 그대 못박힌 손발의 상처에 갈수록 아픔이 생생한 살이 돋는 사랑을 사람들은 믿지 않는다. 그대도 어쩔 수 없다, 사랑의 힘은 그대를 다시 태어나게 하고 우리가 그대의 사랑을 확인할 때 (그것은 항상 너무 늦었을 때) 그대가 확인하는 것은 우리의 돌아선 뒷모습. 그것은 그대의 위대한 슬픔 그대는 슬픔의 시공을 초월하여 있으나 처절한 비참 속에 더욱 처절하게 있어 6․25전쟁이나 죽장, 도끼, 학살, 참상의 끝.
황색예수전, 실천문학사, 1983
김정환 시인 / 성탄
그해 겨울, 그날의 부근 동안을 난 내내 청계천 6가에서 살았다 칠흑 같은 밤이 술렁거렸고, 땀에 찌든 막벌이꾼들의 치미는 근육덩어리들이 반짝였다, 어물전에 산더미처럼 쌓인 생선의 비늘들이 진압치 못해 축축한 성욕처럼 온 세상 위를 꿈틀대며 기어갔다 그리고 밀어닥친 홍수처럼, 아님 밀려난 흥남부두처럼 사람들이 파란 불도 없는 횡단보도를 마구 건너갔다
보따리가건너갔다비틀거리는어깨들이건너갔다물샐틈없는크리스마스캐롤들이건너갔다생계유지걱정무겁게매달린자식새끼들이덕지덕지건너갔다큼지막한헤드라이트불빛들이사방에서마구덮쳐얼굴을갈겼다도대체숨쉴틈을주지않는이땅은누구땅이냐핏발불끈솟아오른리어카꾼의험상궂은욕질이그틈을비집고건너갔다김이모락나는순대가건너갔다홍어찜이건너갔다이조시대민중의수탈을절인오줌냄새가건너갔다그북새통을쫓겨나못비킨다못비켜이자리는죽어도못비킨다아낙네가보따리를움켜쥐고길을건너갔다차량의홍수가흐르는밤거리희미한백열등밑에서맹인여가수의마이크목소리가축축히젖어들었다오늘도걷는다마는청계천6가내가쫓겨나는것이아니다좀더끈끈한삶그래도우리들의희망은희미한가로등과비린내내일의가난을어쩔수없을지라도성시반짝이는것은살아있는것들일뿐산다는것은얼마나위대한가물샐틈도없이사람들이횡단보도를넘쳐흘러갔다.
그해 겨울, 그날의 부근 동안을 난 내내 청계천 6가에서 살았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오늘도 가난의 뱃속에서 희망의 씨앗이 잉태됐고 나는 온통 시끄러운 아수라장 속에서 알았다 반짝이는 것은 비참이 아니라 목숨이라는 것을 목숨은 어떤 비참보다도 끈질기다는 것을 현실은 어떤 꿈보다도 더 많은 희망을 품고 있다는 것을 성스러움의 끈적끈적함을, 끈적함의 견고성을
지울 수 없는 노래, 창작과비평사, 1982
김정환 시인 / 세상은 지금보다 찬란하리라
산동네 골목길 돌면 눈에 밟힐 것이다 이따금씩 민들레도 펴 오르는 다닥 붙은 단칸방 길 밖 살림으로 그렇다 너는 세입자로 오순도순 애들이랑 고향 생각이랑 살았다 부디 똘똘 뭉쳐 둥지 지키려는 안간힘 주먹손이었다 이제 내내 눈에 밟힐 네 모습은 손수 미역국을 끓이던 양복점 아저씨가 더 이상 아니다 모습은 복부와 심장에 회칼 꽂히고 형용은 울다가 엉엉 부르튼 눈에 네 눈 속 우리 눈에도 회칼 꽂히리라 죽인 것은 칼이 아니고 사람이다 그렇다 슬레이트 가옥주, 돈 550만 원이 아니라 독점 아파트업자와 복부인이 너를 죽였다 충청남도 강경 고향길 억세게 가난한 농촌에 1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살길 찾던 상경길 그 길을 배에 칼 꽂힌 채 되밟고 있진 않으리라 우리 눈에 칼 꽂힌 채 두고 홀로 고향 길 찾지는 않으리라 도시 빈민 달동네 세입자 단결투쟁 외치던 성북구 동구여상 후문 옆 벽돌 공터 여기에 남아 제국주의와 독점재벌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을 보리라 그때 비로소 네 배에서 칼이 뽑히고 우리 눈에서 칼이 뽑히리라 그때 세상은 지금보다 찬란하리라 정상률
기차에 대하여, 창작과비평사, 1990
김정환 시인 / 심상치 않지?
그렇지? 오늘 부는 바람은 심상치 않지? 시커먼 연기와 불자동차 같은 것 그렇지? 바람은 보이지 않고 다만 심상치 않지? 문제는 바람은 바람 때문에 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야 바람은 누군가가 움직이는 것 어두운 수풀 얘기가 아냐 대낮 광명에 관한 시멘트와 콘크리트에 관한 얘기라고 오늘 부는 바람은 심상치 않지? 그런 만큼 우리는 아직 소시민이야, 그렇지?
기차에 대하여, 창작과비평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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