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김지하 시인 / 앵적가(櫻賊歌)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11.

김지하 시인 / 앵적가(櫻賊歌)

 

 

만물의 이치는 음양이 근본이라

화합하면 태평하고 상극하면 서로 싸워

싸우는 것 두 중간에 항용 기이한 기이한 꽃이 핀다 전하나니

이 꽃을 두고 일러 사꾸라라 부르것다.

아동방(我東方)이 반도(半島)로서

넓직한 대륙과 길쭉한 도국(島國)에 끼어 밤낮으로

동서남북 왼갖 잡것들이 서로 들어와 맞서 끝없이 불질하는 중에

김성(金姓), 목성(木姓)이 또한 다투고

폭군과 백성이 노상 부딪쳐

하루도 욕질에 매질, 칼질에 팔매질이 멈출 날 없으니

그 사이 맞아 죽는 자 부지기수요

안죽간(安竹間)에 송장이 산더미 같이 쌓이고

수당간(隋唐間)에 흐르는 피가 내를 이워 끝없은 즉

밸 없고 뼈 없는 자 애오라지 바라는 것 그저 제한몸 안명보신(安命保身) 뿐이것다

 

하략

 

다리, 1971

 

 


 

 

김지하 시인 / 역려(逆旅)

 

 

내가 가끔

꿈에 보는 집이 하나 있는데

 

세칸짜리 초가집

빈 초가집

 

댓돌에 피 고이고 부엌엔

식칼 떨어진

 

그 집에

내가 사는 꿈이 하나 있는데

 

뒷곁에 우엉은

키 넘게 자라고 거기

거적에 싸인 시체가 하나

 

아득한 곳에서 천둥소리 울려오는

잿빛 꿈속의 내 집

옛 고부군에 있었다는

고즈넉한

그 집.

 

아침 길 기다란 그림자에서

바람 많던 날들의 노래 소리가 들려오고

길 옆 벽돌담엔

죽어간 이들의 얼굴이 어린다

 

내 이마는 기억의 집

회한과 원한 가득한 진흙창

연꽃 한 송이 일찍 피어

이마를 가르며 붉게 벌어진다

 

어젯밤 어느 문으로 들어왔을까

미친 버드나무가 천정에 목매었는데

산조 한 자락 들려오고

바람이 우수수 일어나고

 

대낮에도 식은땀 흘리며

감옥꿈 꾸며 미소 짓는 주름살 몇 가닥.

 

고름 질질 흐르는

썩어가는 도시의 살에 맑게 비치는

옛 마을의 희미한 실핏줄

핏줄을 찾아

벗이여 살 속으로

다리를 놓자

무쇠솥다리

집을 짓자

세 발 달린 집

고름 흐르는

썩어가는 도시의 살 속에

묻혔던 우뢰가 솟아 터져오르듯

물과 불이 서로 싸우는 다리

 

혁명이다

무쇠솥다리

세 발 달린 집 쇄신이다

부활이다

 

옛 마을의 희미한 실핏줄

핏줄을 찾아 벗이여

다리를 놓자 살 속으로

큰 산이 쿵쿵 울릴 때까지

다리를 놓아

무쇠솥다리

집을 짓자

세 발 달린 집.

 

중심의 괴로움, 솔, 1994

 

 


 

 

김지하 시인 / 우리가 하자

 

 

몹시도 눈이 쌓인 날

치악산 밑에 사는

한 친구 집에 간 일이 있었지.

지금도 생각난다

지금은 어디서 무엇들을 하는지

참 우수한 아이들이었는데

넷이었던가

다섯이었던가

기억은 참되지 않다

기억은 오직 구성될 뿐이다

눈에 덮인 너와집

그 작은 방

그 희미한 촛불

해월 선생처럼 수염을 기르고 엄장 큰 한 분이 농주를 마시고 있었다

첫마디

`베토벤이 죽던 날 마르크스가 태어났지'

긴장할 수 밖에 없었다

긴 논쟁은 한도 끝도 없이 계속되었다

내 기억으로는

그때 나는 낫셀의 방향을 주장했던 것 같고

공과를 지망했던 내 친구는 그 무렵에 벌써 로스토우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얘기는 사분 오열되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한마디는 똑같은 것이었다

`베토벤이 죽어간 날

마르크스가 태어났다

이 점을 기억하라

역사는 대를 이어서 자기의 본체 이성을 발전시키는 법이다

그래서 역사는 진보하는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미끄러지며 넘어지며

고등학교 모자가 날아가고

다시 줏어 쓰며

우리가 얘기한 것은

한 가지였다

`우린 아직 어리다

그러나 이것만은 분명하다

이것도 저것도 다 틀렸다

우리가 하자!'

 

价본ê 하얀방, 분도출판사, 1987

 

 


 

 

김지하 시인 / 우물

 

 

우물에서 달을 길어

빠져 죽었네.

두레박에

 

길게 누운 구름에 묻고 죽었네

꿈꾸든 산머리는

바람에 짤려

고원

아아 고원에서 지나간

지나간 날의 눈 깊은 국경의 밤에

높이 울든 하얀 말

높이 울든 무성의 찰수숫대

목줄기가 찢어졌네

꽃샘 아래 철죽목

 

온갖 이쁜 소리의 방울과 우렁찬

모든 종들이 굳게 굳게 입을 다물 때

밤이 깊으면 마른번개의 밤이 깊으면

젊어서들 죽었네

홀로 깨어 일어나 촛불을 밝힌 죄로

도래질을 남기고 끄덕임도 남기고

 

물 마른 우물전엔 홈을 남기고

드레박에 죽었네

우물에서 달을 길어

빠져 죽었네.

 

황토, 한얼문고, 1970

 

 


 

김지하(金芝河, 1941~) 시인

1941년 전남 목포에서 출생. 서울대 미학과를 졸업. 1969년 『시인』지에 「황톳길」등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는 『황토』, 『타는 목마름으로』, 『오적』, 『애린』, 『검은산 하얀 방』, 『이 가문 날의 비구름』, 『별밭을 우러르며』, 『중심의 괴로움』, 『화개』 등이 있고, 『밥』, 『남녘땅 뱃노래』, 『살림』, 『생명』, 『생명과 자치』, 『사상기행』, 『예감에 가득 찬 숲그늘』, 『옛 가야에서 띄우는 겨울편지』, 대설(大說)『남』, 『김지하 사상전집 (전3권)』, 『김지하의 화두』 등 다수의 저서를 출간. 아시아, 아프리카 작가 회의 로터스 특별상(1975),  국제시인회의 위대한 시인상 (1981), 크라이스키 인권상(1981) 등과 이산문학상 (1993), 정지용문학상 (2002), 만해문학상(2002), 대산문학상(2002) 등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