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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남철 시인 / 또다시 거울 앞에서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12.

박남철 시인 / 또다시 거울 앞에서

 

 

제발 너를 주장하지 마라 너를 주장하지 마라 비록 상대가 얄팍한 처세술로 너의 온 영혼을 두들긴다손 치더라도

 

1

 

넌 누구니

누구다

뭐하는 사람이니

뭐하는 사람이다 뭐라고

뭐하는 사람이라고

 

너는 엄니 아부지가 낳아 주신 그 얼굴을

다 망쳐 놓았구나 너는

굶주렸구나 굶주리긴 했어도

빌어먹진 않았다

너의 눈 그 조그만 야심에 찬 눈

어둡게 교활하지도 못하게

반들거리는 눈(이렇게 쓰면

내가 실지로 야심에 차 있고

반들거리는 눈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생각하는 놈들이

대부분이다) 나는 게으르다 나는

절대로 성실하지 않다 나는 출세를 위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 고 이놈 저놈

사귀지를 않는다 그렇게 하려면 벌써

나는 비정치적이다 반들

거리는 그 눈 그런 소리 마라 그래도

술집애들은 내 눈이 젤─그 말

너의 그 말, 말, 말, 도대체

너의 그 입, 그 썰어, 시끄럽다

왜 자꾸 남의 입술은 가지고 그러니

(이렇게 적으면 내가 실지로

입술에 대하여 열등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놈들이 있다고

생각하며 썼을 거라고 생각할

놈들이, 너 말이야 임마, 바로

너, 이 새끼야, 바로 너 말이야)

나는 현재 비정치적인 정치를 하고 있다─한

꺼번에 다아 먹어 버리려 하고 있다 나는

나는 너무 극단적이다 그러면서도 나는 극단적,

이지 못하다 나는 내가 참으로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을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내가 절대로 내

이익을 위해서 살지 않는 병신─생각한다 병신

같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생각한다 결국, 마침내는 내가 이기고야 말

저 모든 현실주의자들의 최후의 절망의 보금자리가

바로 나─일 것이라고 그러나 나는 생각한다

이 세상에는 진실로 이기고 질 그 무엇도 없을 것이며 다만

 

다만 차가운 거울 하나가 있을 것이며 이 세상에는 진실로

우리가 미워하고 사랑할 그 무엇도 없을 것이며

 

다만

 

다만 세월이 흘러가고 있을 것이며

어떤 놈들은 법을 만들고 어떤 놈들은 정의를 만들고

있으며 또 어떤 놈들은 대학에서(요렇게 쓰면 또 어떤

놈들은 내가 대학에 대하여 많은……) 진리를

알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며 또 어떤 놈들은 자신을

귀족이라고 생각할 것이며 또 어떤 놈들은 자신을,

생각할 것이며(내가 이렇게 써 나가면

또 어떤 놈들은 우리가 회의와 허무의 늪……)

양심이라고 생각할 것이며 또 어떤 우리가 이렇게 써

나가면 또 어떤 놈들은 우리가 또 어떤 자의식 과잉의 늪……

 

(자의식 과잉!)

 

다만 세월이 흘러가고 있을 것이며

다만 차가운 거울 하나가 있을 것이며 그리하여

우리가 이제 이 세상에서 다만 믿을 수 있는 마지막 하나의

그것은 다만, 오오오 세상이여─이 세상에는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 믿음,

 

믿음!

 

2

 

오오오오, 주여……

 

`제발너를주장하지마라'

`너를주장하지마라'

 

비록 상대가

얄팍한 자기 주장으로

너의 사랑을, 송두리째, 짓밟는다손 치더라도

 

지상의 인간, 문학과지성사, 1984

 

 


 

 

박남철 시인 / 멍게

 

 

    `바닷가에,'

    `바닷가에 누워 계시는 외할머님이 보인다'

    `허기가 지셔서 허기가 지셔서 우시고 계신 것이 보인다'

 

    `팔순의 꼬꾸랑 할마시,'

    `한 많은 우리 청상(靑孀) 외숙모님 밑에 얹혀 사시고 계신 것이 보인다'

 

퇴근 길에

석계역 앞에서

리어카 앞에서 멍게를 사 먹으며

어머니 생각을 한다 어머니 생각을 하다

보니 아버지 생각도 난다

멍게, 멍게의 씹히는 살에서

나는 그 옛날의 바다의 바닷가의 외가집이며

철이 니가 그 돈을 좀 갚아 줄 수 없겠느냐……

외숙모님의 아침잠을 깨우시던 그 전화 벨소리도

씹힌다, 외숙모님 죄송합니다…… 멍게,

다아 니 대학 다니느라고 빚진 것 아니냐……

 

…………

 

외숙모님이 아버지에게 돈을 맡기실 때는

제가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였지요…… 외숙모님……

 

……………………

 

그게 다 그런 거 아니냐……

외숙모님은 저희 시골집을 설정해 놓으셨다면서요……

 

응, 그건, 그건, 느이 아부지가 자꾸 그렇게 하라고……

 

외숙모님이 아버지에게 돈 늘려 달라고 돈을 주실 때 저는 그 자리에 없었지요…… 외숙모님…… 그리고 아버지께서는 그 돈은 남에게 떼인 것 같던데요……

 

응, 그, 그렇구나……

 

재호 결혼 비용 때문에 그러신다니 정 그러시다면 외숙모님…… 오셔서 저희들 이…… 전세금이라도……

아, 아, 아이다, 아이다, 철아, 아이다…… 혹시 니한테라도 돈이 있나 해서 한번 전화해 봤다, 아이다, 아이다…… 철아…… 멍게,

 

반시대적 고찰, 한겨레, 1988

 

 


 

 

박남철 시인 / 모범생(1967년­1987년)

 

 

1. 모범생

 

뙤약볕이 내리쬐이는 시골 읍내 로우터리를 교복을 입고 걸어간다 저쪽 버스 정류소 쪽에서 너댓 명이 잔뜩 도사리고 있다가 그 중에서 제일 힘세 보이는 애가 "야 임마 니 일로 쫌 온나 보자!" 한다

 

공터에 가서 얻어 터진다, 공터에 가서 얻어 터진다, 태양빛은 더욱 뜨겁, 고 나는 내가 왜 태어났는가를 저주한다

 

입술에 묻은 피를 닦고, 교복은 털 생각도 못 하며 짓밟힌 가방은 주워 들고 집으로 돌아온다

어머니와 아버지가/이윽고/시꺼멓게 그을린 얼굴로 니야까를 끌고 집으로 돌아오신다

 

2. 술(1985년)

 

오늘 병원에서 현미경으로 임균을, 임균 같은 그대들을 들여다보며, 됐다, 그래, 한 며칠은 구원받을 수 있겠구나…… 했었지……

 

그날 병원에서, 그 정신신경과에서, `OX' 표시를 하다 말고 멍청한, 감기는 눈빛의 반폐인 상태의 어머니를 쳐다보다 말고 화장실에 가서 울다 말고 양변기 위에다 구토를 했었지, 그대들을 생각하며…… 당신들을 생각하며……

 

내 그대들을 사랑하고야 말리라……

내 당신들을 사랑하고야 말리라……

 

이 잔인한 오월에, 나는 내 속의 혁명을 죽이기 아니 깨우기 아니 죽이기 아니 다시 깨우기

 

`위하여'를 외치며, 홀로, 독방에 수감되어, 피눈물을 뿌리며, 똥물까지 토해가며,

 

3. 공소사실

 

피고인은 야간여자상업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는 자인바,

 

1987년 2월 20일 00시 20분경 서울 성동구 송정동 73의 20 앞길에서 피해자 김명진(남, 30세)이 운전하던 서울 4바 7375호 영업용 택시를 타고 가던 중 술에 취해 위 택시 안에 침을 뱉으므로 위 피해자가 피고인의 멱살을 잡아 끌어 내리며 욕설을 하였다는 이유로, 위 피해자의 멱살을 잡아 흔든 다음 땅바닥에 넘어뜨려, 위 피해자에게 폭행을 가한 것이다.

 

반시대적 고찰, 한겨레, 1988

 

 


 

 

박남철 시인 / 박수부대

 

 

나는 국민학교 1학년 때 처음으로 박수치는 법(法)을 배웠습니다. 코흘리개 6년 동안 나는 열심히 박수를 쳤습니다. 중학교 3년은 더욱 열심히 쳤습니다. 담임 선생님은 나의 힘찬 박수 솜씨를 인정하시어 응원부장을 시키려 하셨지만, 아 나는 서슬이 시퍼래져서 사양했지요.

 

―많은 사람들 앞에 나서기가 무서워서요.

 

나는 고등학교 때도 선생님들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답니다. 도대체 이 세상에서 박수 받는 걸 마다할 양반이 어디 한 분이라도 있답디까?

 

그날 담임 선생님께서 입학 원서를 써 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대학에는 `복수(福壽)' 너보다 박수 잘 치는 사람들이 우글우글하니 조심하거라.

 

과연 대학에는 차원 높은 박수쟁이들이 많고도 많았습니다. 페퍼포그에 밀리는 친구들을 구경하면서, `자알 한다, 선구자들이여!'라고 외쳐대는 쟁이들도 있었지요. 나는 그렇게 팔짱끼고 서 있는 쟁이들을 향해, 쟁이들을 향해 박수하는 차원 낮은 실수만을 연발했었습니다. 모든 일들이 아리숭하고 어리둥절하기만 했습니다. 열대성 기후의 태양이 어디 좀 뜨거운 편입니까? 땀에 젖은 나의 박수 소리는 점점 거칠어지기만 했습니다. 어느 누구 하나 내 박수 실력을 인정해 줘야지 말이지요. 나는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어느 바람 세게 불던 날, 술 한 잔 마시고 입대(入隊)를 했습니다. 3년 동안 죽어라고 박수만 쳤었지요. 박수치는 훈련은 참 고되었습니다. 선착순 달리기에서 1등 했다고 한 바퀴 더 도는 나를 보고 김 병장님이 가만히 속삭여 주었습니다.

 

―1등 하지 마라. 꼴찌도 하지 마라. 그저 묵묵하게 박수만 쳐대거라.

 

아아, 그때 그의 그 충고는 독시(毒矢)처럼 내 심장을 꿰뚫었습니다.

 

그 고마우신 김 병장님이 제대한 지 2년쯤 후에, 어언 나도 빈틈없는 박수꾼이 되어 사회(社會)로 나왔습니다. 받고 당하는, 상대를 서서히 썩어가게 해 주는, 박수와 복수(復讐)는 그 소리가 제법 비슷하던가요? 난 비둘기 날개치듯 자유롭게 박수를 칩니다. 태양은 여느 때처럼 이글거리고, 이글거리고, 나의 박수 소리는 4분의 3박자로 경쾌합니다.

 

가수(歌手) 박 아무개의 박수부대요? 흥, 나야 이제 걔들 뺨치지요.

 

지상의 인간, 문학과지성사, 1984

 

 


 

박남철(朴南喆) 시인

1953년 경북 포항에서 출생.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同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 1979년 《문학과 지성》 겨울호에 시 〈연날리기〉 외 3편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저서로는 시집으로 『지상의 인간』 (문학과지성사, 1984)와 『반시대적 고찰』(한겨레, 1988 / 세계사, 1999) , 『러시아집 패설』(청하, 1991)와『자본에 살어리랏다』(창작과비평사, 1997), 『바다 속의 흰머리뫼』 (문학과지성사, 2005), 『제1분』(문학수첩, 2009)과 시선집 『생명의 노래』(문학세계사, 1992) 와 박덕규와의 공동시집 『그러나 나는 살아가리라』 (청하, 1982)와 박남철 비평시집  『용의 모습으로』 (청하, 1990)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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