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향림 시인 / 가족
나는 서투르다. 은행나무 분재를 들여놓아도 곧 낙엽 져 떨어진다. 허리 잘린 그 몸에 아기 손처럼 돋아 하늘을 받들던 잎들이 진다. 그 뒤에 하릴없이, 죄송하다는 듯이 물이나 잔뜩 끼얹어 줄뿐이다. 흙 속에 가늘게 뻗은 뿌리들이 제 몫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노향림 시인 / 갈멜 수녀원(修女院)
무슨 날이었다.
층계옆에 팔걸이 의자(椅子)가 하나 놓여 있었다.
손발이 큰 말오줌나무가 허탈 속에 손을 찌르고 서 있었다.
첨탑(尖塔)의 햇볕들을 열고
새들이 와서 하느님의 말씀을 꺼내어 갔다.
천상(天上)인지 어딘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읍 기행, 현대문학, 1977
노향림 시인 / 강변마을
찻집 '째즈'에 올라간다. 카펫 붉게 깔린 3층 계단 옆에서 제 몸짓보다 큰 트럼펫을 들고 흑인 가수 루이 암스트롱의 커다란 눈망울이 나를 노려본다. 브랜드 커피엔 하얀 각설탕을! 카푸치노? 아니, 아니 나는 블랙만 마실거야, 블랙홀보다 검은 커피 한 잔이 내 앞에 당도한다. 나느 강변이 내려다보이는 창가가 좋다. 오늘따라 바람이 센지 짱짱한 구름떼만 하늘에서 펄럭인다. 브레지어가 흘러내리고 흰 속치마가 절반쯤 뜯기고 찢겨나간 구름을 보는 것이 좋다. 아직 봄은 일러서 오지 않고 꽃샘바람에 눈꺼풀 닫은채 종일 공중을 향해 팔을 벌리고 벌서듯 서 있는 나무들, 매캐한 매연 속에 푸른 잎을 틔울까 말까 생각 중이다. 그 슬픔을 하나의 보석으로 마음의 블랙홀에 켜놓았다. 나트륨등이 반짝 켜진다.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김정환 시인 / 어느 무명 코메디안에게 외 2편 (0) | 2020.02.12 |
|---|---|
| 김지하 시인 / 오적(五賊) (0) | 2020.02.12 |
| 박남철 시인 / 또다시 거울 앞에서 외 3편 (0) | 2020.02.12 |
| 고정희 시인 / 상복 외 3편 (0) | 2020.02.12 |
| 도종환 시인 / 섬 외 1편 (0) | 2020.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