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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노향림 시인 / 가족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12.

노향림 시인 / 가족

 

 

나는 서투르다.

은행나무 분재를 들여놓아도

곧 낙엽 져 떨어진다.

허리 잘린 그 몸에 아기 손처럼 돋아

하늘을 받들던 잎들이 진다.

그 뒤에 하릴없이,

죄송하다는 듯이 물이나 잔뜩 끼얹어 줄뿐이다.

흙 속에 가늘게 뻗은 뿌리들이 제 몫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노향림 시인 / 갈멜 수녀원(修女院)

 

 

무슨 날이었다.

 

층계옆에

팔걸이 의자(椅子)가 하나

놓여 있었다.

 

손발이 큰 말오줌나무가

허탈 속에

손을 찌르고

서 있었다.

 

첨탑(尖塔)의 햇볕들을 열고

 

새들이 와서

하느님의 말씀을

꺼내어 갔다.

 

천상(天上)인지 어딘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읍 기행, 현대문학, 1977

 

 


 

 

노향림 시인 / 강변마을

 

 

찻집 '째즈'에 올라간다.

카펫 붉게 깔린 3층 계단 옆에서

제 몸짓보다 큰 트럼펫을 들고

흑인 가수 루이 암스트롱의 커다란 눈망울이

나를 노려본다.

브랜드 커피엔 하얀 각설탕을!

카푸치노? 아니, 아니

나는 블랙만 마실거야,

블랙홀보다 검은 커피 한 잔이

내 앞에 당도한다.

나느 강변이 내려다보이는 창가가 좋다.

오늘따라 바람이 센지 짱짱한 구름떼만

하늘에서 펄럭인다.

브레지어가 흘러내리고

흰 속치마가 절반쯤 뜯기고 찢겨나간

구름을 보는 것이 좋다.

아직 봄은 일러서 오지 않고

꽃샘바람에 눈꺼풀 닫은채

종일 공중을 향해 팔을 벌리고

벌서듯 서 있는 나무들,

매캐한 매연 속에

푸른 잎을 틔울까 말까 생각 중이다.

그 슬픔을 하나의 보석으로 마음의

블랙홀에 켜놓았다.

나트륨등이 반짝 켜진다.

 

 


 

노향림 시인

1942년 전라남도 해남에서 출생. 1965년 중앙대 영문과 졸업. 1970년 《월간문학》 시 부문 신인상에 〈불〉 등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K읍 기행』(1977), 『눈이 오지 않는 나라』(1987), 『그리움이 없는 사람은 압해도를 보지 못하네』(1992), 『후투티가 오지 않는 섬』(1998) 『해에게선 깨진 종소리가 난다』(2005)  등이 있음.   대한민국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이수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