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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 시인 / 섬
당신이 물결이었을 때 나는 언덕이라 했다. 당신이 뭍으로 부는 따스한 바람이고자 했을 때 나는 까마득히 멈추어 선 벼랑이라 했다 어느 때 숨죽인 물살로 다가와 말 없는 바위를 몰래몰래 건드려 보기도 하다가 다만 용서하면서 되돌아갔었노라 했다 언덕뿐인 뒷모습을 바라보며 당신은 살았다 했다 당신의 가슴앓이가 파리하게 살갗에 배 나올 때까지도 나는 깊어가는 당신의 병을 눈치채지 못하였고 어느 날 당신이 견딜 수 없는 파도를 토해 내 등을 때리고 한없이 쓰러지며 밀려가는 썰물이 되었을 때 놀란 얼굴로 내가 뒤돌아보았을 때 당신은 영영 돌아오지 못할 거리로 떠내려 가 있었다 단 한 번의 큰 파도로 나는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당신을 따라가다 따라가다 그만 빈 갯벌이 되어 눕고 말았다 쓸쓸한 이 바다에도 다시 겨울이 오고 물살이 치고 돌아오지 못한 채 멈추어 선 나를 세월은 오래도록 가두어 놓고 있었다.
접시꽃 당신, 실천문학사, 1986
도종환 시인 / 쇠비름
뿌리째 뽑아 내어 열흘 밤 열흘 낮 말려 봐라. 수액 한 방울 안 남도록 두었다 뿌리 흙 탁탁 털어 가축떼에게 먹여 봐라. 씹히고 씹히어 어둡고 긴 창자에 갇히었다 검게 썩은 똥으로만 나와 봐라. 서녘 하늘 비구름 육칠월 밤 달무리로 장마비 낮은 하늘에 불러올 때 팥밭의 거름 속에 숨어 빗줄기 붙들고 핏발 같은 줄기들 다시 흙 위에 꺼내리니 연보라 팥꽃 새에 이놈의 쇠비름 이 질긴 놈의 쇠비름 소리 또 듣게 되리라. 머리채를 잡힌 채 아아, 이렇게 끌리어 가도.
玆菅Ì 마을에서, 창작과비평사,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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