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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도종환 시인 / 섬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12.

도종환 시인 / 섬

 

 

당신이 물결이었을 때 나는 언덕이라 했다.

당신이 뭍으로 부는 따스한 바람이고자 했을 때

나는 까마득히 멈추어 선 벼랑이라 했다

어느 때 숨죽인 물살로 다가와

말 없는 바위를 몰래몰래 건드려 보기도 하다가

다만 용서하면서 되돌아갔었노라 했다

언덕뿐인 뒷모습을 바라보며 당신은 살았다 했다

당신의 가슴앓이가 파리하게 살갗에 배 나올 때까지도

나는 깊어가는 당신의 병을 눈치채지 못하였고

어느 날 당신이 견딜 수 없는 파도를 토해 내 등을 때리고

한없이 쓰러지며 밀려가는 썰물이 되었을 때

놀란 얼굴로 내가 뒤돌아보았을 때

당신은 영영 돌아오지 못할 거리로 떠내려 가 있었다

단 한 번의 큰 파도로 나는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당신을 따라가다 따라가다

그만 빈 갯벌이 되어 눕고 말았다

쓸쓸한 이 바다에도 다시 겨울이 오고 물살이 치고

돌아오지 못한 채 멈추어 선 나를

세월은 오래도록 가두어 놓고 있었다.

 

접시꽃 당신, 실천문학사, 1986

 

 


 

 

도종환 시인 / 쇠비름

 

 

뿌리째 뽑아 내어 열흘 밤 열흘 낮 말려 봐라.

수액 한 방울 안 남도록 두었다

뿌리 흙 탁탁 털어 가축떼에게 먹여 봐라.

씹히고 씹히어 어둡고 긴 창자에 갇히었다

검게 썩은 똥으로만 나와 봐라.

서녘 하늘 비구름 육칠월 밤 달무리로

장마비 낮은 하늘에 불러올 때

팥밭의 거름 속에 숨어 빗줄기 붙들고

핏발 같은 줄기들 다시 흙 위에 꺼내리니

연보라 팥꽃 새에 이놈의 쇠비름

이 질긴 놈의 쇠비름 소리 또 듣게 되리라.

머리채를 잡힌 채 아아, 이렇게 끌리어 가도.

 

玆菅Ì 마을에서, 창작과비평사, 1985

 


 

도종환 시인

1954년 충북 청주에서 출생. 충북대 국어교육학과 및 同 대학원 졸업. 1984년《분단시대》를 통해 작품활동 시작. 저서로는 시집으로 『두미마을에서』, 『접시꽃 당신』,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지금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 『당신은 누구십니까』, 『사람의 마릉에 꽃이 진다』, 『부드러운 직선』, 『슬픔의 뿌리』 등이 있고, 산문집 『지금은 묻어둔 그리움』, 『그대 가슴에 뜨는 나뭇잎배』, 『그때 그 도마뱀은 무슨 표정을 지었을까』,『모과』, 『마지막 한 번을 더 용서하는 마음』 등과 동화 『바다유리』 등이 있음. 1997년 제7회 민족예술상 수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국회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