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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예강 시인 / 드로잉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12.

김예강 시인 / 드로잉

 

 

당신이 비로소

말을 한다

 

얼음의 노래인가

차갑고도 투명하다

녹아내리면서

말을 한다

당신의 눈은 찌그려져가고

반짝인다

당신의 눈이

말을 한다

 

나는 당신의 어깨를 흔든다

톡톡 등을 두드린다

손가락 끝이 닿자

그림자가 흔들린다

 

당신이 비로소

말을 한다

 

뒷모습이 작아지는 당신이

녹아내린다

걸어가던 당신이 멈춘다

당신이 비로소

말을 한다

 

천년이 지난다

 

계간 『사이펀』 2019년 가을호 발표

 

 


 

 

김예강 시인 / 일요일의 시

 

 

너는 눈 먼 사람

잠시 내 등을 빌려 너의 눈을 가지렴

 

너는 눈을 두고 온 사람

내 등에 너의 손을 얹고 일어나 보렴

 

바닥은 나를 계단 밑으로 데려왔다 지팡이가 바닥을 톡톡

두드릴 때마다 접혔던 날개가 펼쳐진다 조금 흔들렸다가

지상으로 내려앉는 새처럼 날개를 접는다, 지팡이를 쫙

펼치고 날아간다 기억하는 바닥에서 기억을 밀고 날아나간다

없는 기억들, 긴 의자에 고개를 숙이고 너는 등을 말았다

 

모퉁이마다 두드린 그림자들

그에게만 맡아지는 향기가 있듯 지팡이가 기둥을 톡톡 칠 때

기둥은 부르르 떨었으리라

 

향기를 맡아보렴

무릎에서 손바닥을 펴 보렴

 

나는 나만 만지는 길을 기억한다

 

나는 손을 어디다 두었을까

 

눈 먼 그가 나의 등을 쥐고 걸어 나간다 손이 사라진 나의,

호주머니에서 손 뺀 적 없는 나의, 손 대신 입을 크게 벌려 노래한다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서로의 손이 되어

 

나는 손을 어디다 두었는지 모르는 사람

너는 나의 등을 쥐고 걸어 나가는 사람

 

시를 읽는다 그리고 시는 없어진 손처럼 호주머니 속에 살고 있다.

 

계간 『주변인과 문학』 2019년 봄호 발표

 

 


 

김예강 시인

부산교육대학교 및 同 대학원 졸업. 2005년《시와 사상》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고양이의 잠』(작가세계, 2014)이 있음. 웹진 『시인광장』과 계간 『시와 사상』 편집장 역임. 현재 계간 『시와 사상』 부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