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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노향림 시인 / 가을 구화학교(口話學校)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11.

노향림 시인 / 가을 구화학교(口話學校)

 

 

무엇이 될까. 생각합쳐

하늘이 고개 높이 들고

모여 서서,

 

얕으막한 구화학교(口話學校) 울타리

손에 손에 갑갑함 칠한 채

은사시나무들

늘어 서서

 

무엇이 될까. 하늘은 하늘대로

골목은 골목대로

탁탁탁

갈라서 있다.

 

앞날이 없는 아이들이

예사처럼 웃는다.

 

엇바뀌어 누운 마른 풀속의

그는

마음뿐인 평화(平和) 만들며

 

코박은 실기장(實技場) 돌들은

저희끼리 얼굴 찡그리며

우울하다.

 

연습기를 띄우고, 연희, 1980

 

 


 

 

노향림 시인 / 가을 노래

 

 

누군가 동전만한 햇볕들이

텅 빈 거리에 떨어진 것을 봅니다.

 

인사불성인 땡볕과

아스피린 몇 알.

 

아직 귀가하지 못한

중학생 아이의 탈선이

숨죽여

리어카 뒤에 숨고 맙니다.

 

지천으로 쌓인 철 이른 밀감들이

철 안 든 아이들의

말들로 묻혀 있고

 

들여다보면

편두통을 앓는지

말에는 아직

발긋발긋 실핏줄이 비쳐 보입니다.

날개 없는 어깻죽지도 보입니다.

 

햇볕에 등 기대고

기댈 데가 있어

대만족인 주인은 듣고 있습니다.

 

이따금 가을의 섬세한

은빛 날개 스치는 소리.

 

그리움이 없는 사람은 압해도를 보지 못하네., 문학사상사, 1992

 

 


 

 

노향림 시인 / 가을편지

 

 

안녕하세요? 가을입니다.

발끝까지 풀려버려

허한

빛으로 흩날리고 있군요.

 

발 밑에

흔적처럼 남은

물이나 쓸쓸함.

 

기댈 곳 없는 나는 재채기를 쏟아냅니다.

그동안 기대던 가난한 식구와

낡은 가구와 해골 같은 한편의 시를 버리고

등언저리를 모두 비어놓았습니다.

아무 한 일 없이, 누구도 만난 일 없이

가을과 나는 한 몸이어서

다 해진 하늘, 마른 햇볕을 자꾸 쏟아냅니다.

스물스물 빠져나가던 가을은

다시 무엇이 되어 나와 함께

누렇게 시들어가고 있는지

어디 들판에 흩어져 있는지

선천성 약질인 폐를 부풀리는 나무 곁에

함께 누워있는지

두리번댑니다.

두리번대도 온통 가을뿐이예요.

씌어질 때 씌어지더라도

씌어지지 않는 단 한 줄의

우리 고통, 안녕!

 

 


 

노향림 시인

1942년 전라남도 해남에서 출생. 1965년 중앙대 영문과 졸업. 1970년 《월간문학》 시 부문 신인상에 〈불〉 등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K읍 기행』(1977), 『눈이 오지 않는 나라』(1987), 『그리움이 없는 사람은 압해도를 보지 못하네』(1992), 『후투티가 오지 않는 섬』(1998) 『해에게선 깨진 종소리가 난다』(2005)  등이 있음.   대한민국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이수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