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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희 시인 / 바벨탑과 마을
산짐승 몇 마리 마을에 끌려와 죽은 목숨처럼 길들고 있다
포수는 총에 손질을 끝내고 길들다 숨진 사슴의 골반을 흥정한다 길들다 숨진 사슴의 뼈를 추린다 길들다 숨진 사슴의 골반을 흥정하는 포수와 길들다 숨진 사슴의 뼈를 추리는 포수가 햇빛 쨍한 대낮 길들다 숨진 사슴 한 마리 박제를 끝낸다
박제된 사슴 한 마리 속에 퍼렇게 박제된 한 세대의 본능 박제된 사슴 한 마리 속에 삭정이처럼 박제된 한 시대의 이성 박제된 한 세대의 꿈을 아는 건 박제된 한 마리 사슴뿐이고 박제된 한 시대의 생명을 아는 건 박제된 한 마리 사슴뿐
바벨탑에 가위눌린 푸른 신경 하나 포수의 총에 꽂히면 어디선가 한 마리 또 한 마리 짐승이 끌려오고 그때, 여전히 노역을 떠나는 마을 사람들 어깨 너머 소소히 부는 바람 잠든 본능 속으로 스며든다
한국대표시인 100인선집 90 뱀사골에서 쓴 편지, 미래사, 1991
고정희 시인 / 벌거숭이산을 위하여
풀어진 나를 몰아 벼랑에 세우고 직진하는 추위를 만났지 집으로 쫓겨와 삭발을 하고서, 친구여 벌거숭이산의 추위가 무엇인지 알았어 철길 위로 달려와 나를 흔드는 바람 직진하는 추위에 도취되던 날 나는 구름처럼 떠올라 빙벽의 궁전으로 열려 있었지 확고 부동하게 열려 있었지 사막 위를 질주하는 파라오의 고독과 나의 이 순절한 슬픔이 부딪쳐 정신-만세라고 소리칠 수 있다면, 벽이란 벽의 비장한 바위 틈에 강이란 강물 쏟아져 물바다 한세상 차랑차랑 너-나 빈몸으로 흐를 수만 있다면, 날으는 돌 춤추는 칼의 하늘이고 싶었지 아무도 모르는 벌거숭이산 하나 쩡 하고 울때, 친구여 객혈보다 무서운 불똥으로 쏟아져 우릉우릉 폭발하는 화산(火山)이고 싶었지 그뿐이고 싶었지
이 시대의 아벨, 문학과지성사, 1983
고정희 시인 / 봄비
가슴 밑으로 흘려보낸 눈물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모습은 이뻐라 순하고 따스한 황토 벌판에 봄비 내리는 모습은 이뻐라 언 강물 풀리는 소리를 내며 버드나무 가지에 물안개를 만들고 보리밭 잎사귀에 입맞춤하면서 산천초목 호명하는 봄비는 이뻐라 거친 마음 적시는 봄비는 이뻐라 실개천 부풀리는 봄비는 이뻐라
오 그리운 이여 저 비 그치고 보름달 떠오르면 우리들 가슴속의 수문을 열자 봄비 찰랑대는 수문을 쏴 열고 꿈꾸는 들판으로 달려나가자 들에서 얼싸안고 아득히 흘러가자 그때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하리 다만 둥그런 수평선 위에서 일월성신 숨결 같은 빛으로 떠오르자
이 시대의 아벨, 문학과지성사, 1983
고정희 시인 / 사랑법 첫째
그대 향한 내 기대 높으면 높을수록 그 기대보다 더 큰 돌덩이 매달아 놓습니다. 부질없는 내 기대 높이가 그대보다 높아서는 아니 되겠기 내 기대 높이가 자라는 쪽으로 커다란 돌덩이 매달아 놓습니다. 그대를 기대와 바꾸지 않기 위해서 기대 따라 행여 그대 잃지 않기 위해서 내 외롬 짓무른 밤일수록 제 설움 넘치는 밤일수록 크고 무거운 돌덩이 하나 가슴 한복판에 매달아 놓습니다.
이 시대의 아벨, 문학과지성사, 1983
고정희 시인 / 산지기를 노래함
`입산 금지' 팻말 뒤에서 시원하게 열린 그대 바라보는 날 내 가슴은 마구 뛰었다 푸르게 우거진 그대 숲속으로 무량한 바람 흔적 없이 빨려들고 파란 하늘이 둥그렇게 떠오를 때 산은 한없이 으쓱해 보였다
산에서 출렁이는 햇빛과 바람 산에서 부서지는 물 소리와 바람 소리 산에서 피어나는 밤안개 너머로 서서히 짙어지는 불빛, 그래 그대는 불빛이었다 내가 불빛을 따라가려 했을 때 누군가 내 뒷덜미를 잡았다
"조심해. 입산 금지라구" 그래―그래―그래 푸른 산 푸른 숲에 가리운 그대여 그대는 거대한 산에 있으므로 흔들릴 뿌리 같은 건 없어야 하지
그대 뒤로 하고 산을 내려올 때 툭 불거진 돌부리에도 내 생애 전부가 훅훅 뒤틀렸다 캄캄한 밤이었다
이 시대의 아벨, 문학과지성사,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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