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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 시인 / 당신은 누구십니까
강으로 오라 하셔서 강으로 나갔습니다 강으로 수천개 햇살을 불러내어 찬란하게 하시더니 산그늘로 모조리 거두시고 바람이 가리키는 아무도 없는 강 끝으로 따라오라 하시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숲으로 오라 하셔서 숲속으로 당신을 만나러 갔습니다 만나자 하시던 자리엔 일렁이는 나무 그림자를 대신 보내곤 몇 날 몇 밤을 붉은 나뭇잎과 함께 새우게 하시는 당신은 어디에 계십니까
고개를 넘으라 하셔서 고개를 넘었습니다 고갯마루에 한 무리 기러기떼를 먼저 보내시곤 그중 한 마리 자꾸만 뒤돌아보게 하시며 하늘 저편으로 보내시는 뜻은 무엇입니까
저를 오솔길에서 세상 속으로 불러내시곤 세상의 거리 가득 물밀듯 밀려오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타났단 사라지고 떠오르다간 잠겨가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상처와 고통을 더 먼저 주셨습니다 당신은 상처를 씻을 한 접시의 소금과 빈 갯벌 앞에 놓고 당신은 어둠 속에서 이 세상에 의미 없이 오는 고통은 없다고 그렇게 써 놓고 말이 없으셨습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저는 지금 풀벌레 울음으로도 흔들리는 여린 촛불입니다 당신이 붙이신 불이라 온몸을 태우고 있으나 제 작은 영혼의 일만팔천 갑절 더 많은 어둠을 함께 보내신 당신은 누구십니까.
당신은 누구십니까, 창작과비평사, 1993
도종환 시인 / 봉숭아
우리가 저문 여름 뜨락에 엷은 꽃잎으로 만났다가 네가 내 살 속에 내가 네 꽃잎 속에 서로 붉게 몸을 섞었다는 이유만으로 열에 열 손가락 핏물이 들어 네가 만지고 간 가슴마다 열에 열 손가락 핏물 자국이 박혀 사랑아 너는 이리 오래 지워지지 않는 것이냐 그리움도 손끝마다 핏물이 배어 사랑아 너는 아리고 아린 상처로 남아 있는 것이냐
접시꽃 당신, 실천문학사,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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