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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희 시인 / 상복
죽은 사람들만 사는 마을이 있었다 한 번쯤 관 속에 들어갔다 왔으므로 이곳에선 생사가 뚜렷하지 않았다 사는 것이 곧 죽는 것일 수 있고 죽는 것이 또한 사는 것이었다 입관할 때 입는 옷이 상복으로 통했다 이승 사람들은 이곳을 사차원의 세계라고 지칭하기도 하고 골치 아픈 저승이라고도 말했다 어느 날 이곳에 패션 쇼가 열렸다 이승으로 수출할 의상 발표회였다 디자이너는 내노라 하는 장의사였는데 염에서 하관까지 사용되는 마포로 양복과 원피스와 한복을 만들고 노끈과 새끼줄과 대못으로 허리띠와 장신구를 만들었다 이승에서 달려온 바이어들은 원더풀, 베리굿을 연발한 나머지 장래 10년 동안 전속계약을 맺었다 이승의 일간지 여성란들은 앞으로 10년 동안 의류계 주종업이 상복일 것이라고 대서특필했다
이 시대의 아벨, 문학과지성사, 1983
고정희 시인 / 상한 영혼을 위하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 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이 시대의 아벨, 문학과지성사, 1983
고정희 시인 / 서울 사랑 -1-
오호 소리꽃 네로구나 오호 침묵꽃 네로구나 오호 인내꽃 네로구나 오호 낙엽꽃 네로구나 오호 타작꽃 네로구나 오호 추도꽃 네로구나 오호 죽순꽃 네로구나 오호 갈대꽃 네로구나 오호 망초꽃 네로구나 (어랑어랑 어화 어랑어랑 어화)
에헤 꽃 핀다고 다 핀 것은 아니란다 에헤 잎 진다고 다 진 것은 아니란다 에헤 떠난다고 다 간 것은 아니란다 (어랑어랑 어화 어랑어랑 어화)
어허―날 저물어 세상은 잠들고 어허―날 저물어 이 봄도 잠드니 어허―해 저물어 청춘은 애늙은이 어허―길 저물어 인생은 오리무중 (어랑어랑 어화 어랑어랑 어화)
아니란다 아니란다 끝난 것 아니란다 새봄 찾아와도 끝난 것은 아니란다 새날 찾아와도 끝난 것은 아니란다 새복 맞아들여도 끝난 것은 아니란다 새물에 발 담궈도 끝난 것은 아니란다 (어랑어랑 어화 어랑어랑 어화)
오라 돼지꽃 네로구나 오라 황소꽃 네로구나 오라 늑대꽃 네로구나 오라 이리꽃 네로구나 오라 여우꽃 네로구나 오라 안개꽃 네로구나 (어랑어랑 어화 어랑어랑 어화)
세계가 무너져도 지렁이꽃 피는 강산 두 동강이 나라여도 개구리꽃 피는 강산 뱀꽃 한 잎 입에 물고 하늘 한번 쳐다보고 흑염소꽃 한 잎 물고 하늘 한번 쳐다보고 (어이 넘차 어허 넘차 어허어이 넘차)
아니란다 아니란다 잊은 것은 아니란다 가는 세월 속에서도 잊은 것 아니란다 길 가로막혀도 올 것은 오고 수전벽해라 해도 남는 것은 남는단다 (어이 넘차 어허 넘차 어허어이 넘차)
오오 눈물꽃 네로구나 오오 하늘꽃 네로구나 오오 자유꽃 네로구나 오오 얼음꽃 네로구나 오오 적막강산 적막꽃 네로구나
이 시대의 아벨, 문학과지성사, 1983
고정희 시인 / 서울 사랑 -2-
빨래터에서도 씻기지 않은 고(高)씨 족보의 어둠을 펴 놓고 그 위에 내 긴 어둠도 쓰러뜨려 네 가슴의 죄 부추긴 다음에야 우리는 따스히 손을 잡는다 검은 너와 검은 내가 손잡은 다음에야 우리가 결속된 어둠 속에서 캄캄하게 쓰러지는 법을 배우며 흰 것을 흰 채로 버려두고 싶구나 너와 나 검은 대로 언덕에 서니 멀리서 빛나는 등불이 보이고 멀리서 잠든 마을들 아름다와라 우리 때묻은 마음 나란히 포개니 머나먼 등불 어둠 주위로 내 오랜 갈망 나비되어 날아가누나 네 슬픈 자유 불새되어 날아가누나
오 친구여 오랫동안 어둠으로 무거운 친구여 내가 오늘 내 어둠 속으로 순순히 돌아와 보니 우리들 어둠은 사랑이 되는구나 우리들 어둠은 구원이 되는구나 공평하여라 어둠의 진리 이 어둠 속에서는 흰 것도 검은 것도 없어라 덕망이나 위선이나 증오는 더욱 없어라 이발을 깨끗이 할 필요도 없어라 연미복과 파티도 필요 없어라 이 어둠 속에서 우리가 할 일은 오직 두 손을 맞잡는 일 손을 맞잡고 뜨겁게 뜨겁게 부둥켜 안는 일 부둥켜 안고 체온을 느끼는 일 체온을 느끼며 하늘을 보는 일이거니
오 캄캄한 어둠 속에서 당당하게 빛나는 별이여 내 여윈 팔등에 내려앉는 빛이여 너로구나 모른 체할 수 없는 아버지 눈물 같은 너로구나 아버지 핏줄 같은 돈으로 도시에서 대학을 나오고 삼십평생 시(詩)줄이나 끄적이다가 대도시의 강물에 몸 담그는 밤에야 조용히 조용히 내려앉는 빛이여 정작은 막강한 실패의 두 손으로 한 웅큼의 먹물에 받쳐든 흐-이-망 여전히 죽지 않는 너로구나
이제야 알겠네 먹물일수록 찬란한 빛의 임재, 그러니 빛이 된 사람들아 그대가 빛으로 남는 길은 그대보다 큰 어둠의 땅으로 내려오고 내려오고 내려오는 일 어둠의 사람들은 행복하여라
이 시대의 아벨, 문학과지성사,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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