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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정환 시인 / 어느 무명 코메디안에게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12.

김정환 시인 / 어느 무명 코메디안에게

 

 

어쩌면 남북통일보다도 힘든 일인데

어색한 조명, 텅 빈 무대의 공간 위에서

그대는 서투른 몸짓으로 막간의 어색함을 메꾼다

눈은 격고지 부대일수록 심하게 내려

그대와 우리를 가르고 있다

어색한 조명 속에서 눈발이 미친 듯 흩날려 댄다

그대는 아직도 서투른 말로써 막간의 어색함을 메꾼다

그것은 이미 오래된 숙명임을 알고 있으나

이 순간만은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이 순간만은 처자식이 딸려서가 아니라

거대한 숙명을 이기듯이

그대는 서투른 언사로 막간의 어색함을 메꾼다

북괴를 초전에 박살내야죠

근무태세는 똥도 누지 말아야 합니다

너는 너대로 우리는 우리대로

이렇게 어색한 만남에 진땀 흐른다

그러나 행여 허망하다는 생각은 하지 말거라

문선대 공연은 끝나고 눈발은 여전히 흩뿌리는데

삽시간에 전쟁비상이 걸린 듯이 우리가 각자 군용트럭에 몸을 싣고

병참은 병참으로 수색은 수색으로

3대대는 3대대로 1대대는 1대대로

온 천지에 경적을 빵빵 울리며 삽시간에 흩어지는

헤어짐의 장관을 보이더라도

그대는 헤어짐의 노래를 단원끼리 무대 위에서 아직도 부르며

안녕히 가십시오. 감사합니다. 눈발 흐트러지는 속에서

행여 허망하다는 생각은 갖지 말거라

낯익은 가난의 해진 옷감을 스스로 꿰매듯이

우린 우리의 상처를 스스로 바느질하리라

그대가 보여준 어색한 만남의 감동을

처절하게 기억하리라

눈발은 마침내 스스로도 장관이 되어 흩날리고

군용트럭에 실려 떠나는 우리들의

흔들리는 어깨 뒤에서

그대들이 부르는 서툰 노래는

뜨겁고, 뭉클하기만 하다.

 

지울 수 없는 노래, 창작과비평사, 1982

 

 


 

 

김정환 시인 / 오월곡(五月哭)

 

 

   푸르디푸른 조선의 하늘 아래서

   우리는 끝까지 우리의 인간성을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젖가슴 잘리고 대포 총칼에 흐트러진 살점으로

   낯익은 거리에 피바다로 흐르면서도 우리는

   끝까지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소망을

   끝까지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끝까지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근육을

   우리를 배반한 것은 백주의 대낮이었습니다

   그 대낮에 끔찍한 일이 저질러졌던 것입니다

   은밀한 죄악의 밤조차 진저리쳤던 대낮이었습니다

 

그러나 쓰러진 자는 다시 살아 이렇게 외칩니다

그해에 우리는 무엇을 보았는가 쓰러진 자의 거대함

상처투성이 목숨의 찬란함 보았는가 그해에

무엇을 보았는가 쓰러지고 또 쓰러지는

목숨 다해 피 철철 흐르는 붉은 태양 보았는가

자유여 가난이여 목숨이여 공동체여

무엇을 보았는가 이 골목 저 신작로에 쌓인 시체더미

그 위로 치솟는

반역이며 총칼의 이빨이며 웃음소리며

보았는가 어둠의 얼굴을 어둠의 정체를

어둠의 개백정을 어둠의 양민학살을

찬란함이여 비린내여 펄펄 살아 뛰는 목숨의 비명소리여

지치고 지친 목숨의 끝

죽음이 끝내 한줌 남은 목숨보다 위대한 시간

쓰러짐이 인산인해로 나뒹구는 피비린내 끓는 학살의 끝

그렇다 우리는

결코 더 이상은 물러설 수 없는

우리들 가난의 힘이 스스로 죽창으로 치솟아

푸르디푸른 하늘을 이루는 것 보았다

우리들 쓰러짐이

정의와 간사한 도배들 확연히 갈라놓는 것 보았다

쓰러지고 일어서고 또 일어서는

우리들 가난의 공동체여, 짓밟힘이여, 신음소리여

차라리 목놓아 울부짖을

맨땅이 갈라질 함성소리여

아아 그렇다 우리는

피맺힌 굶주림이 스스로 불끈불끈 솟는 근육을 이루는 것 보았다

피맺힌 것은 분노뿐 아니라 사랑뿐 아니라

굶주린 목숨 그 자체인 것 보았다

그것이 백성임을

그것이 우리임을 보았다

아아 피맺힌 자유, 피맺힌 제3세계여 공동체여

피맺힌 평야, 핏발 서린 눈동자여

아아 피골상접이여 사막이여 위대한 싸움터여

 

   푸르디푸른 조선의 하늘 아래서

   우리는 끝까지 우리의 인간성을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젖가슴 잘리고 대포 총칼에 흐트러진 살점으로

   낯익은 거리에 피바다로 흐르면서도 우리는

   끝까지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소망을

   끝까지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끝까지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근육을

   우리를 배반한 것은 백주의 대낮이었습니다

  그 대낮에 끔찍한 일이 저질러졌던 것입니다

 

은밀한 죄악의 밤조차 진저리쳤던 대낮이었습니다

 

좋은 꽃, 민음사, 1985

 

 


 

 

김정환 시인 / 우리들의 나라, 노동자 세상

 

 

이 세상의 맨 처음에

우린 우리들의 부모를 떠났고 우리들의 고향을 떠났다

이 세상의 맨 처음에

손발이 댕겅 잘리는 프레스 작업대에서 하꼬방 다락방 할미꽃으로 허리 꺾인 여공 시다로

우린 이 세상을 만들었다

 

이 세상의 맨 처음에

우린 배가 고파 밥을 달라고 하였다

우리가 만든 밥, 우리가 만든 옷을 나눠 달라고 하였다

춥고 배고파요 견딜 수 없어요, 제발 조금만 주세요 애원하였다

몇 사람이 무참히 피를 흘렸다, 몇 사람이 개같이 끌려갔다, 살진 돼지처럼 맞아 죽었다,

 

그리고 몇백 만의 눈물이 이 세상을 홍수로 넘치게 하고서야

저들은 우리들의 헐벗고 발가벗은 몸을 겨우겨우 가려주었고

우리들의 주린 배를 겨우겨우 채워 주었다

우리들이 지은 밥, 우리들이 만든 옷, 우리들이 쌓은 벽돌, 아아 우리들이 건설한 나라

 

우리들이 이 세상의 주인이므로

우리들 몇 사람이 피 흘렸을 때 세상은 앞장서서 피를 흘렸고

몇 사람이 끌려갔을 때 세상이 앞장서서 끌려갔다

수백만이 눈물 흘렸고 부모와 처자식과 동지와 고향과 조국이, 온 세상이 더불어 눈물 흘렸다

 

우리들이 조금 더 많은 것을 저들에게 부탁했을 때

우리들은 기계가 아녜요, 우리들은 짐승이 아녜요, 인간답게 살고 싶어요 애원했을 때

저들은 왜놈의 장도칼로 우리들의 배를 쑤셨고, 파쇼 경찰의 몽둥이로 우리들의 골통을 빠갰고, 미제의 총으로 우리들의 심장을 꿰뚫었다

수많은 사람이 피를 흘렸고 수많은 사람이 끌려갔고 수많은 사람이 업수임 당했고 수많은 사람이 능욕 당했다

 

우리들이 지은 밥, 우리들이 만든 옷, 우리들이 쌓은 벽돌, 아아 우리들이 건설한 나라

 

우리들이 이 세상의 주인이므로

우리들 수많은 사람이, 사람다운 노동자가 피를 흘렸을 때 세상은 온몸으로 피를 흘렸고

우리들 수많은 사람이, 사람다운 노동자가 끌려갔을 때 세상은 온몸으로 끌려갔다

 

이제 상처투성이 세상인 우리가 나서야 한다

떨쳐 일어나, 갈비뼈 부러지고 내장이 쏟아져 나온 이 세상을

세상인 우리가 뜯어 고쳐야 한다

우리가 일어서지 않으면

세상이 일어서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해방되지 않으면

세상이 해방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피 흘리는 세상의 상처를 닦아 내지 않으면

세상은 피 흘리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우리들이 지은 밥, 우리들이 만든 옷, 우리들이 쌓은 벽돌, 아아 우리들이 건설할 나라

 

보다 나은 세상, 보다 나은 우리 스스로 다시 한 번 건설하기 위하여

우리는 전태일의 순결한 피로 평화의 세상을 이룰 것이다

우리는 김경숙의 꽃다운 피로 해방의 세상을 이룰 것이다

우리는 김종태 박종만 박영진 김장수 오범근 아아 억울한 투쟁의 피로

만인의 전쟁에서 만인의 평화로

만인의 참혹함에서 만인의 아름다움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빛에서 피땀의 찬란한 삶으로 나아갈 것이다

우리는 우리들의 투쟁으로 우리를 해방시키며

민족통일세상으로 나아갈 것이다

 

아아 우리들의 나라, 노동자가 주인 되는 세상

아아 우리들의 나라, 만백성이 주인 되는 세상

 

우리 노동자, 동광출판사, 1989

 

 


 

김정환(金正煥, 1954년 ~ ) 시인

서울에서 출생하였고,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1980년 《창작과 비평》에 시 〈마포강변 동내에서〉 등이 추천되어 등단. 주요 작품으로 〈해방 서시〉,〈유채꽃밭〉 등이 있으며 시집으로 《황색예수》,《지울 수 없는 노래》,《좋은 꽃》 등이 있다. 시대의 진실을 밝혀내려는 결의와 열린 감성으로 우리 시대의 언어에 일대 변혁을 몰고 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시를 폭포처럼 쏟아”낸다는 평을 받을 정도로 다작하는 시인이다. 2007년 시집 《드러남과 드러냄》으로 제9회 백석문학상을 받았고 2009년에는 제8회 아름다운 작가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