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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송연숙 시인 / 측백나무 울타리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13.

송연숙 시인 / 측백나무 울타리

 

 

누가 아무도 없는 벌판에

측백나무 울타리 세워놓았나

안쪽도 바깥도 없는 그 울타리 드나들며

나는 안쪽에서 바깥을, 또 바깥에서

안쪽을 넘겨보거나 내다보곤 했다

또 아주 오래전 허물어진 옛집을 수습해서

울타리에 기대 놓았다

그럴 때면 앞마당과 뒤란이

저희들끼리 순서를 정하곤 하였다

 

집을 품지 않은 울타리는 울타리가 아니어서 벌판에서 벌판으로 몇 천리 가면 기차가 떠나는 간이역이 있고 또 어느 쪽으로 몇 시간 동안 그 기차를 타고 가면 어리둥절한 양떼들이 있다 양들에게 측백나무 울타리에 관해 물으면 예전 자신들이 구름의 일족으로 흘러 다닐 때 언뜻 본 것도 같다는 말을 하였다

 

측백나무 울타리에

오래전에 무너진 집을 다시 세운다

거미는 아침이슬로 기둥도 세우고 처마도 만드는데

머리가 먼저 이슬에 들어가 집을 짓는다

팔은 팔대로 다리는 다리대로

둥근 배마저 이슬의 방을 하나씩 차지한다

 

안쪽도 바깥쪽도 없는 집

순서도 모서리도 신음도 만들지 않는 집

측백나무 울타리엔

거울 하나 둥실 매달려 있다

 

2019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당선시

 

 


 

 

송연숙 시인 / 서명

 

 

인동넝쿨에 인동 꽃 피었다

어디에서 어디까지 가는 향기냐고 묻고 싶은데

꽃들, 지독한 필체로

줄기마다 서명을 하고 있다

 

존재들, 저마다의 필체로 서명을 한다 입술 서명으로 연서를 완성하는 앵두, 푸른 모자의 목련 잎사귀는 목판본 새기듯 정갈한 필체를 가졌다 잎사귀 사이마다 검붉은 간인間印까지 찍어가며 서명하는 것을 좋아하는 뽕나무, 단 한 번의 서명으로 가랑잎처럼 날아간 집문서와 흘림체의 구름으로 흩어지는 가족들, 함초롬 바탕위에 햇살만 꾹꾹 받아쓰는 자주 달개비는 거느릴 식구들이 완두콩알처럼 많았다

 

초서체의 노련한 필체로

아침을 휘휘 감아 오르는 나팔꽃 옆에

엉겅퀴의 필체만 흉내 내는 지칭개, 지천이다

밤무대를 전전하는 짝퉁 같은 지칭개지만

너훈아에게는 너훈아의 삶이 있다고

의심하지 말라고

틀림없는 계절이라고

저마다의 서명으로 제철을 공증公證하는 것이다

 

식물들의 서명은 정확하다

공중과 땅속 가리지 않고

심은 곳, 날아와 안착한 곳 모두

그 증거를 다하고 있다

 

2019년 《국민일보》 신춘문예 밀알상 당선시

 

 


 

송연숙 시인

2016년 월간 《시와 표현》 신인상으로 등단. 2019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당선. 2019년 《국민일보》 신춘문예 밀알상 당선. 시집으로 『측백나무 울타리』(시와표현, 2019)가 있음. 현재 『시와 표현』 편집장, 한국시인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