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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강주 시인 / 그림자 표본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13.

강주 시인 / 그림자 표본

 

 

그림자를 밟습니다. 으깨어져요. 뭉개집니다. 넘어진 그림자를 일으켜 세웁니다. 지금까지의 그림자는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폐허가 건드리는 마음을 붓습니다. 불 꺼진 십자가는 불 켜진 십자가보다 돋을새김이고 나를 둘러싼 쇠락의 징조로 균열을 갖춥니다. 훌륭한 표본은 서로의 윤곽을 흩트리기 좋고 잔혹한 동화처럼 저녁을 맞이할 때 시간은 말이 많아집니다

 

경험담으로 이해와 오해를 구분할 수 없고 내가 믿는 이해는 오해이기 십상이어서 돼지를 데이지로 장마를 장미로 이해도 오해도 아닌 말과 용서를 반복하느라 손은 시들어갑니다

 

시간에 현혹당한 가엾은 사람이어서 유감이고 극적인 해안선은 불안정하므로 칸막이를 놓을까요. 조개껍데기로 그림자를 감싸며 너의 왼쪽 손목에게 편지를 씁니다

 

‘그림자를 꺾지 마세요’ 푯말을 뽑아들고,

 

계간 『시와 희곡』 2019년 가을호 발표

 

 


 

 

강주 시인 / 모래와 시계는 떼어졌다 붙는다

 

 

  다시 몸이 생기는 아침. 흘러내리는 시간은 유난히 반짝여. 인간을 사물화한 이름은 수많지. 약속은 감염이 쉬워 금방 잊지. 계속 고쳐 쓰는 일은 잃어버린 몸을 되찾는 일. 제자리에 멈춰 있는 능소화. 삶과 죽음이 동시에 뒤집혀. 어쩌면 처음부터 하나였을지 모를 상하. 능소화가 떨어져. 바람은 이 세계의 숨소리고 들숨과 날숨으로 순환되지. 다시 뒤집으면 능소화는 돌아와. 은밀한 약속이지. 여러 겹의 이야기는 우리의 둘레. 썼다 지우는 이야기는 파도야. 마주하고 있는 삶과 죽음처럼. 음지와 양지는 시곗바늘로 나뉘지. 그건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면서 우리를 둘러싸지. 결과가 좋기도 나쁘기도 하다는 건 불가사의야. 모래와 시계는 떼어졌다 붙으며 우리를 여닫아. 창밖엔 한 사람이 서성거려. 다시 뒤집으면 한 사람이 여러 사람이 되는 것도 순간이야. 겨울을 유지하려고 눈이 내려. 한 송이씩 떼어졌다 붙으며

 

계간 『포지션』 2019년 가을호 발표

 

 


 

강주 시인

강원도 동해에서 출생. 제1회 정남진 신인시문학상 수상과 2016년 계간 《시산맥》 신인상으로 등단. 2019년 대산창작기금 수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