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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윤이 시인 / 내 여자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13.

김윤이 시인 / 내 여자

 

 

 당신은, 수수한 여자 같아요. 독감으로 몸져누운 날, 고열인 상태로 속삭임 들었습니다. 비몽사몽간 말허리 잘린 듯한 옛말이 뭔 뜻인가 싶었습니다. 잘해봐야 사려 깊은 그의 인사말일 뿐이었고 그 말이 내 여자란 말은 아니었건만, 제멋대로 사랑의 암시인가 하였습니다. 전화하면 문병을 올까, 나는 나에게 쉼없이 감추기를 강요하였겠지만 어느 쯤엔가는 들켜도 모른다 했겠지요. 저절로 생리 묻은 팬티인 듯 속옷을 갈아입고, 땀 식히고, 하루 일과를 정리하며 여름부터 기르는 수생 수국의 물을 갈아주었습니다. 그새 뿌리는 허송세월 없다는 듯 사방으로 뻗었지요. 그에게 보여주려던 화분인데 보는 이 없이 산홋빛 꽃만 커졌기에 그럴 바에야 다음해에나 꽃 보자 결론짓고, 꽃숭어리 분질러 꽂았던 겁니다.

 

 기다림도 어느덧 수국 같아서 내 몸집보다 화려하게 피어 있었습니다. 뚝! 반절로 꺾어야 하는 거였습니다. 그래야 해 넘겨서까지 꽃 볼 수 있는 거였습니다. 온종일 소복처럼 간소한 차림으로 기다리자니 어쩐지 애처로운 모양새 같았습니다만, 마음 준 내 여자, 여자를 나는 올해도 홀가분히 내려놓진 못했습니다.

 

시집『다시없을 말』(문학수첩, 2019) 중에서

 

 


 

 

김윤이 시인 / 도마뱀

 

 

거기 서 달라 외쳤어

저녁 끼닛거리 해먹다말고

외론 마음 동쳐매고 빈들로 나갔어

네 뒤 바짝 벼르듯 틈새 길 도마뱀 밟았어

가시나 내 몸짓이 엉겁결에 짓뭉갰어

태양이 꺼져드는 순간에 꼬리 끊긴 섬도마뱀

횃불 타는 석양 속으로 배는 밀려갔어

뒷자락 붙들던 저녁처럼 난 어둡고 왜소해졌어

살갗 벗겨진 피부를 맨손으로 만질 때

도리 없이 알았어 가엾은 처지 나였어

36.5℃ 온기도 오금 저릴 심장도 잃은 거였어

검붉은 피와 뿜어대는 김 없이

불장난에 데인 상처만 꼬물거렸어

도마뱀은 아픈 살점 짧게 끊은 거였어

고작 핏대 세워 기어간 거였어

너 없는 나였어 나 잃은 나였어

문전걸식으로 벌레 구해먹던 도마뱀! 날 조심시키네

상처가 붙기 전 거동하면 도로 생은 상처에 끌려 다니지

 

태양이 동네를 한 바퀴 돌 참이 지났을까

어디메쯤 있는 게냐 가도 가도 내 머시마

남몰래 도지던 발병도 가져가라,

도륙하듯 끊는다했어

수천 떼비늘로 둥근 지평선 불타올랐어

건사 못한 맘 싣고 날마다 이 포구의 막배가 끊겼어

형체 없는 환지통이 꽁무니 길어졌어

불현듯 일용할 양식으로

외로움이 많아졌어

 

시집『다시없을 말』(문학수첩, 2019) 중에서

 

 


 

김윤이 시인

1976년 서울에서 출생. 200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트레이싱페이퍼〉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흑발 소녀의 누드 속에는』(창비, 2011),  『독한 연애』(문학동네, 2015), 『다시없을 말』(문학수첩, 2019)가 있음. 웹진 『시인광장』 편집장 역임. 현재 〈시힘〉동인으로 활동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