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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지하 시인 / 해남에서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11. 16.

김지하 시인 / 해남에서

 

 

섣달 보름달 기우는 새벽

용머리 샘물 속에

건너편 우슬고개 붉게 물들이며

갓 태어나는 애기먼동

내 얼굴 함께

시누대 함께 비칠 때

 

언제든 어디서든

눌러앉을 차비 끝낸 마음이

잠시 서성여 거기 흔들릴때

 

잔설 밟고 온 내 발자욱 나란히

아침해 향해 거꾸로 찍혀 있네.

 

별밭을 우러르며, 동광출판사, 1989

 

 


 

 

김지하 시인 / 화살내

 

 

화살은 왜 나에게 떠 오나

화살은 왜 나를 향해서 오나

화살은 왜

화살은 왜 내 가슴에 아프게 박히나

화살은 왜 이 개울을 따라서 흘러 오나

화살은 왜 물을 따라 흐르나

화살은 물을 따라 나에게 오고

나는 물을 따라 화살을 거슬러 가고

너는 누구냐

물.

 

价본ê 하얀방, 분도출판사, 1987

 

 


 

 

김지하 시인 / 황불

 

 

갔네

황불이 일어

하늬도 소소리도

회오리도 없이 고인 불

잠 속에 고인

불 속에 깊이 고인 불 속에 내린

육신의 육신의 뿌리에 내린

쳐라 신명을 타내리네

황불이 일어

내리는 빗발이

솟구치는 육신의 휘모리에 타내리네

신명을 타내리네

황불이 황불이 황불이 일어 쳐라

나는 물덩어리 너는 물덩어리

나는 너의 불덩어리

차라리 서로 부딪쳐 파열해버려야만

속시원할 난장의 빗발 아래

황불이 일어

갔네

육신에 내리친 계엄의 미친

저 난장 위에 저 총창 위에 저 말발굽 위에

저 바리케이트 위에도 되게 쳐라

활활활 황불이 일어

갔네

개처럼 끌려갔네

하늬도 소소리도 회오리도 없이 고인 불

황불이 일어.

 

황토, 한얼문고, 1970

 

 


 

 

김지하 시인 / 회귀

 

 

목련은 피어

흰빛만 하늘로 외롭게 오르고

바람에 찢겨 한 잎씩

꽃은 돌아

흙으로 가데

 

가데

젊은 날

빛을 뿜던 친구들 모두

짧은 눈부심 뒤에 남기고

이리로 혹은 저리로

아메리카로 혹은 유럽으로

하나 둘씩 혹은 감옥으로 혹은 저승으로

 

가데

검은 등걸 속

애틋했던 그리움 움트던

겨울날 그리움만 남기고

무성한 잎새 시절

기인 긴 기다림만 남기고

 

봄날은 가데

목련은 피어

흰빛만 하늘로 외롭게 오르고

바람에 찢겨 한 잎씩

꽃은 돌아

흙으로 가데

 

가데

젊은 날

빛을 뿜던

아 저 모든 꽃들 가데.

 

별밭을 우러르며, 동광출판사, 1989

 

 


 

김지하(金芝河, 1941~) 시인

1941년 전남 목포에서 출생. 서울대 미학과를 졸업. 1969년 『시인』지에 「황톳길」등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는 『황토』, 『타는 목마름으로』, 『오적』, 『애린』, 『검은산 하얀 방』, 『이 가문 날의 비구름』, 『별밭을 우러르며』, 『중심의 괴로움』, 『화개』 등이 있고, 『밥』, 『남녘땅 뱃노래』, 『살림』, 『생명』, 『생명과 자치』, 『사상기행』, 『예감에 가득 찬 숲그늘』, 『옛 가야에서 띄우는 겨울편지』, 대설(大說)『남』, 『김지하 사상전집 (전3권)』, 『김지하의 화두』 등 다수의 저서를 출간. 아시아, 아프리카 작가 회의 로터스 특별상(1975),  국제시인회의 위대한 시인상 (1981), 크라이스키 인권상(1981) 등과 이산문학상 (1993), 정지용문학상 (2002), 만해문학상(2002), 대산문학상(2002) 등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