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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전영관 시인 / 달이라는 형식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16.

전영관 시인 / 달이라는 형식

 

 

노을을 끌 줄 몰라서

타고 남은 숯덩이의 엔딩 크레딧까지 읽었다

 

저녁마다 시전(施展)되는 무료영화라고

유급한 신학생 표정으로 웃었다

 

노을이 사위면 달이 뜨듯

다음을 예감해도 지루하지 않으니까

신의 솜씨일 것

 

잔물결로 남겨지는 물위의 발자국처럼

암호 같은 희망을 남발하는 신

 

바람도 없는데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순간처럼

행(行)하면서 질문하면 침묵하는 신

 

사람마다 몌별(袂別)의 통증을 연출해놓고

지켜만 보는

그믐에도 지나가는 달 같은 존재 신

 

노을만 보면

생의 서사가 절반은 타버리는 것 같다

던져진 질문도 없는데

과거를 소환해보고 잊지 않으려 다짐했다

 

보름의 나른함이 싫증날 때마다

하현에 이르도록 달을 깎고 깎은

신의 불안을 생각한다

 

밤새도록 하늘을 걸었으니 그믐엔 기척도 없는지

몸을 바꾸는 까닭 역시 불안은 아닌지

달이라는 신의 형식을 편집하고 싶다

 

계간 『시로 여는 세상』 2018년 겨울호 발표

 

 


 

 

전영관 시인 / 어성전*

 

 

검은 이불을 끌어당기듯

여울이 산 그림자를 덮는다

 

나란히 세워두고 거둬 먹이는 느릅나무 물푸레나무도

우는 어미 등 뒤에 머뭇거리는 아들들 같이

침묵의 먹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맑은 날이면 별들이 봉싯거렸는데

객지 나갔다 술 취해 들어온 아버지처럼

눈발은 따귀와 등짝을 가릴 것 없이 몰아친다

어깻죽지가 부러지도록 눈을 짊어지는 날이면

전나무 생살 찢어지는 소리가

여울에 실려 밤새 동해로 내려간다

술 깨듯 눈이 그치면

마당으로 날아가 엎어진 사발처럼 고요히

모든 것들이 웅크리고 서로를 다독인다

 

여울은 은어가 올라오는 물발을 터주고

꺽지의 억센 가시를 다스리면서

열목어의 눈 붉은 과거사를 품어준다

 

겨울 물소리는 듣는 사람만 듣는다더니

불을 끄고 누우면 정수리부터 몸으로 들어온다

목덜미를 서늘하게 하고 가슴에서 소(沼)를 이뤄

맴돌다가 언제인지 모르고 잠들 듯 흘러나간다

 

저녁의 전부를 실토해도 양양 바다는

어김없이 아침인 것이다

 

* 양양 남대천 상류계곡

 

계간 『시로 여는 세상』 2018년 겨울호 발표

 

 


 

전영관 시인

충남 청양에서 출생. 2008년 《진주신문》, 2011년  《작가세계》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바람의 전입신고』(세계사, 2012)가 있음. 2010년 서울문화재단 지원금 수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