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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고정희 시인 / 프라하의 봄 6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18.

고정희 시인 / 프라하의 봄  6

 

 

어머니

더는 잠드실 수 없나보군요

흙탕물 질펀한 유세마당에

적막한 주름살로 서 계시는

어머니

이천 년도 더 짓밟히신 어머니

열 손가락 피 깨물면서도

개과천선 그날을

못 버리시다니

하녀노릇 옥살이 지겹지도 않나요

몸 팔아 자손들 먹여 살리시느라

다국적 사창가 전전하면서

육천 마디마다 쇠바늘 꽂아놓고

긴긴 날궂이 버티신 지난날

누구를 그다지도 기다리셨나요

점찍으신 자손들은 옥문이나 드나들고

보필하신 자손들은 객사귀신 되어

구천의 하늘이나 떠돌고 있는데

경천애민(敬天愛民) 그날을

못 버리시다니

 

어머니

그날은 꼭 올까요

어머니의 백일 금식

효험이 있을까요

오늘은 당신의 12대 회갑잔치,

남은 자손들 얼기설기 모여앉아

유례없는 말잔치

유례없는 공수표로

한상 떡벌어지게 `먹자판' 벌여놓고

"만수무강 하사이다" 기원축수 드리니

뼛골에 사무치는 시장기 감추시고

망연자실 펄럭이는, 펄럭이는

어머니

 

이 시대의 아벨, 문학과지성사, 1983

 

 


 

 

고정희 시인 / 프라하의 봄  8

 

 

오매, 미친년 오네

넋나간 오월 미친년 오네

쓸쓸한 쓸쓸한 미친년 오네

산발한 미친년 오네

젖가슴 도려낸 미친년 오네

눈물 핏물 뒤집어 쓴 미친년 오네

옷고름 뜯겨진 미친년

사방에서 돌맞은 미친년

돌맞아 팔다리 까진 미친년

쓸개 콩팥 빼놓은 미친년 오네

 

오오 오월 미친년 오네

히, 히, 하느님께 삿대질하며

하늘의 동맥에다 칼을 꽂는 미친년

내일을 믿지 않는 미친년 오네

까맣게 새까맣게 잊혀진 미친년

이미 사망신고 마친 미친년

두 눈에 쌍불 켠 미친년 오네

철철철 피 흐르는 미친년

아무것도 무섭잖은 맨발의 미친년

아무것도 걸리잖는 미친년 오네

 

누가 당하나

사지에 미친 기운 불끈불끈 솟아

한 손에 횃불 들고

한 손에 조선낫 들고

수천 마리 유령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허접쓰레기들 훠이훠이 불사르러

허수아비 잡풀들 싹둑싹둑 자르러

오 무서운 미친년

위험스런 미친년 달려오네

(여엉자야, 수운자야…… 미친년 온다

문단속 해라…… 이럴 땐 ××이 제일이니라)

 

이 시대의 아벨, 문학과지성사, 1983

 

 


 

 

고정희 시인 / 프라하의 봄 11

 

 

보셨습니까, 폐하

사람들은 왼쪽 가슴에 검은 리본을 달고 있었습니다

출근버스 속에서 만난 승객들은

가슴에 검은 리본을 달고 있었습니다

식당에서 만난 사람들은

가슴에 검은 리본을 달고 있었습니다

신문사 사옥에서 만난 볼펜노동자들은

볼펜 발바닥에 검은 리본을 달고 있었습니다

방송국 빌딩에서 만난 남사당패들은

귀걸이와 목걸이와 장삼자락에

검은 리본을 달고 있었습니다

대학가에서 만난 남녀 대학생들은

에스오에스 모르스 부호 부호처럼

하얀 이마에 검은 리본을 달고

상여 소리 따라 행진하고 있었습니다

웬 줄 아셨습니까. 폐하

그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

오매불망 삼삼이던 그는 이미

실종되었다는 거였습니다

죽은 거나 다름없다는 거였습니다

면사무소 호적계는

마지막 사망신고를 기다리고

제기랄, 다음달이 탈상이랍니다

또 누구 안 태어날까요, 폐하

 

이 시대의 아벨, 문학과지성사, 1983

 

 


 

 

고정희 시인 / 프라하의 봄 12

 

 

      죽음이여, 늙은 선장이여

      이제 시간이다 닻을 올려라

      ―보들레르의 「악의 꽃」중에서

 

너 드디어 왔니

일백이십 개의 눈깔을 달고

일백이십 개의 가면을 가진

지옥의 괴물

너 드디어 왔니

지옥의 뱃사공와 함께 왔니

때로는 나의 뱃속에서 자라고

때로는 우리의 밥사발에서 자라고

때로는 선생님의 양심에서 자라고

때로는 서울의 예수에게 달라붙어

말거머리처럼 달라붙어

볼록볼록 불룩불룩 피를 빨던

너 드디어 왔니

일백이십 개의 오랏줄과

이백오십 조항의 율법과

오백육십 종류의 박제술을 가진

지옥의 문지기 너 왔니

미친 개자식, 너 왔니

날 잡으러

예까지 왔니

놓아 길렀더니 아주 먹으러 왔니

 

살았구나 풀꽃이여

벼랑에 뿌리내린 너는 피어

오리온성좌로 떠오르겠구나

 

이 시대의 아벨, 문학과지성사, 1983

 

 


 

 고정희【高靜熙, 1948 ~ 1991. 6. 9】 시인

본명은 성애. 1948년 전남 해남에서 출생, 한국신학대학 졸업. 1975년 《현대시학》 추천으로 등단. 교수 잡지사 기자 등을 거쳐 『또 하나의 문화』 창간 동인, 『여성신문』 초대 편집주간을 역임. 1991년 6월 지리산에서 실족사로 요절.  '목요시' 동인으로 오월 시인으로 활동.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1979), 『실락원 기행』(1981), 『초혼제』(1983), 『이 시대의 아벨』(1983), 『눈물꽃』(1986), 『지리산의 봄』(1987), 『저 무덤 위에 푸른 잔디』(1989), 『광주의 눈물비』(1990), 『여성 해방 출사표』(1990), 『아름다운 사람 하나』(1991) 등의 시집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