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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희 시인 / 현대사 연구 1
꽃은 누구에게나 아름답습니다 호박꽃보다야 장미가 아름답고요 감꽃보다야 백목련이 훨씬 더 아름답습니다 우아하게 어우러진 꽃밭 앞에서 누군들 살의를 떠올리겠읍니까 그러므로 우리들의 적이 숨어 있다면 그곳은 아름다운 꽃밭 속일 것입니다
어여쁜 말들을 고르고 나서도 저는 같은 생각을 했읍니다 모나고 미운 말 건방지게 개성이 강한 말 누구에게나 익숙치 못한 말 서릿발 서린 말들이란 죄다 자르고 자르고 자르다보니 남은 건 다름아닌 미끄럼타기 쉬운 말 찬양하기 좋은 말 포장하기 편한 말뿐이었읍니다 썩기로 작정한 뜻뿐이었읍니다 그러므로 말에도 몹쓸 괴질이 숨을 수 있다면 그것은 통과된 말들이 모인 글밭일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데 서른 다섯 해가 걸렸다니 원)
이 시대의 아벨, 문학과지성사, 1983
고정희 시인 / 호박
호박이 익었다 우리나라 땅에서만 자라온 토종호박들이 불볕 더위 아래 이리 딩굴 저리 딩굴 누릿누릿 호박이 익었다 조선땅 어디서나 흙에 심기만 하면 토담이고 울타리고 쑥쑥 뻗어올라 못생긴 꽃타래를 피워내고 하대받는 풋호박을 주렁주렁 달아 놀고먹는 건달들이 쿡쿡 찔러보는 토종호박 흉년 들면 서민들의 밥이 되고 난세에는 마적떼들의 죽밥이 되는 조선 토종호박이 익었다
호박은 호박인 탓으로, 그러나 손톱에 할퀸 데는 할퀸 자죽을 내고 도리깨질 당한 데는 당한 자죽을 내고 군화발에 밟힌 데는 밟힌 자죽을 내고 철사줄에 묶인 데는 묶인 자죽 그대로 지난 아픔 그대로 또렷이 익어버린 조선호박, 삼천리의 밥인 호박 케이농장에서 호박이 익었다 노릿노릿 뭉실둥실 호박이 익었다 엿 해먹기 좋은 호박이 익었다 에잇, 엿먹어라
이 시대의 아벨, 문학과지성사, 1983
고정희 시인 / 히브리 전서(傳書)
한 사나이가 언덕을 오르고 있었읍니다. 한 사나이가 언덕을 오르고 한 사나이의 이마에 두 줄기 핏방울이 흐르고 있었읍니다. 한 사나이가 골고다 언덕을 오르고 오르고 오르고 오르다 쓰러지고 맨살의 등줄기에 매섭고 긴 채찍이 수없이 내리치고 있었읍니다. 사나이는 쓰러지고 불볕 같은 햇빛 아래 사내는 지쳐 쓰러지고 갈릴리 해변은 한없이 적막한 바람에 뒤덮이고 아,
한 사내가 골고다 언덕에 다시 쓰러지고 있었읍니다. 목말라 비틀거리는 사내는 자기 키보다 더 큰 나무 십자가를 메고 골고다로 골고다로 올라가고 있었읍니다. 마리아, 그녀의 한(恨)에 절은 눈물과 가슴을 외면한 채 주검보다 무거운 고독에 짖눌린 마리아 그녀의 폭탄 같은 오열을 외면한 채 사나이는 먼 곳으로 가고 있었읍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사내는 대학을 다닌 적도 없읍니다. 부귀를 누린 자도 아닙니다. 권력을 가진 적도 없읍니다. 그럴싸한 명사를 만난 적도 없읍니다. 가난한 거리와 버림받은 이웃과 냄새나는 유대의 거리 그 천한 백성들의 눈물과 한숨이 있었을 뿐입니다. 율법에 두 발 묶인 죄의 사슬로부터 무섭도록 외로운 삶의 멍에로부터 도망치고 싶을 뿐인 불쌍한 무리들, 동정받을 일밖에 없는 히브리의 단 하나 친구인 그리스도는 가진 것 없는 당신 주제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줘야만 했읍니다. 처음엔 기적을, 그 다음엔 정신을 그 다음엔 영혼을, 그 다음엔 그의 전생애와 주검까지도 죄 많은 유대에게 넘겨 줘야 했읍니다. 그리고 마지막엔 부활까지라도 그 찢어지게 가난한 히브리에게 무더기로 넘겨 준 사내, 멋진 사내 예수. 그는 공부를 많이 한 적도 없읍니다. 세도의 가문은 더욱 아니고 오직 별볼일 없는 갈릴리 어촌의 목수였읍니다.
마지막까지 세상 죄 다 짊어지고 피 한 방울 남김 없이 다 쏟아 버린 그 사내가 성금요일 오후 세시 마지막 숨을 거둘 때 성당의 휘장이 갈라지고, 그를 본 영혼들은 한꺼번에 쩍, 금이 가고 있었읍니다.
이 시대의 아벨, 문학과지성사,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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