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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마종기 시인 / 꽃의 이유(理由)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19.

마종기 시인 / 꽃의 이유(理由)

 

 

꽃이 피는 이유를

전에는 몰랐다.

꽃이 필 적마다 꽃나무 전체가

작게 떠는 것도 몰랐다.

 

사랑해본 적이 있는가,

누가 물어보면 어쩔까.

 

꽃이 지는 이유도

전에는 몰랐다.

꽃이 질 적마다 나무 주위에는

잠에서 깨어나는

물 젖은 바람 소리.

 

그 나라 하늘빛, 문학과지성사, 1991

 

 


 

 

마종기 시인 / 늦가을 바다

 

 

우리들의 평화가 가깝게 다가와서

형제들의 물살과 서로 섞이는구나.

엉기고 뒹굴면서 하나가 되는구나.

물살 되어서 결국 보이지 말거라.

수심이 보이지 않는 당신을 어루만진다.

 

문득 지나간 날의 흰 파도 한 개,

우리들의 몸도 이렇게 만나서 부딪치면

당신도 몸 사리지 못하고 꽃이 되겠지.

그 꽃 피어나는 몸짓이 되겠지.

 

어느 틈에 벌써 어두워지는 바다,

사면이 좁아서 내 눈이 새삼 밝아지고

더 이상 파도 소리 들리지 않아서

두 귀는 더 맑아지는구나.

 

어깨를 숙이는 올해의 마지막 가을,

너를 놓아두어라, 아무도 없는 내 저녁 근처,

흔들리는 연옥의 부끄러운 두 손,

너를 놓아두어라, 빈 바다의 복판에

희미한 네 얼굴이 멀어지고 있다.

 

그 나라 하늘빛, 문학과지성사, 1991

 

 


 

 

마종기 시인 / 떠다니는 노래

 

 

허둥대며 지나가는 출근길에서

가로수 하나를 점찍어 두었다가

저문 어느 날 그 나무 위에

새 둥지 하나를 만들어 놓아야지.

살다가 어지럽고 힘겨울 때면

가벼운 새가 되어 쉬어가야지.

옆에 사는 새들이 놀라지 않게

몸짓도 없애고 소리도 죽이고,

떠다니는 영혼이 아는 척하면

그 추운 마음도 쉬어가게 해야지.

 

둥지의 문을 열어놓고 무엇을 할까.

얼굴에 묻어 있는 바람이나 씻어줄까.

조건을 달지 않으면 모두가 가볍군.

우리들의 난감한 사연도 쉽게 만나서

당신 속에 들어가 잠을 청해도

이제는 아프지도 않은지 웃고 있구나.

 

그 나라 하늘빛, 문학과지성사, 1991

 

 


 

 

마종기 시인 / 망자(亡者)의 섬

 

 

당대(當代)의 시인(詩人) 에즈라 파운드는 배신자라는 낙인 때문에 그리던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외국땅 이탈리아 망자의 섬에 죽어 묻힌지 13년이 되었다.

 

  1

 

  나는 시(詩)를 버리더라도

  먼저 바른 길을 가려 보자.

  센 바람 불어 쓰러지면 다시 일어나고

  약속한 뜻은 겁이 나도 지키고

  힘들면 울어도 포기하지 말자.

  딴 소리 하는 시인(詩人)은 헛소리로 듣고

  웃음거리 되더라도 서 있자.

  밤새워 깎고 다듬은 서투른 끌질에

  피 흘리고 떨어져나간 감상(感傷)의 햇수들

  이제는 전신에 뜻없는 상처로 남아도

  내가 흥겨워서 벌였던 한판,

  그 이상 내가 무엇을 바라랴.

 

   2

 

  에즈라 파운드의 고향은

  감자가 많이 나는 아이다호주(州),

  해마다 감자들은 생살을 째고

  피 흘리는 생살을 흙에 비벼서

  안 보이는 땅 속에 양식을 마련한다.

  고향의 감자꽃은 슴슴하지만

  아프지 않고는 여기 살 수 없다고

  아무나 감자 옆에 누울 수는 없다고

  슴슴하게 웃고 가는 고향의 감자꽃.

 

  3

 

  섬에서는 망자(亡者)들이 소리 죽여 울고

  우는 어깨 위에 나비가 앉는다.

  작은 언덕이 바람에 밀려 다니고

  모두 부질없음을 알고 난 후에도

  돌멩이 몇 개 언덕을 기어오른다.

  밤에는 심한 비가 자주 내리는 섬,

  빗소리에 잠이 깨면 그새 육탈(肉脫)이 된 몸,

  뼈 사이로 스미는 빗물의 차가움에

  몇 개의 뼈는 벌써 피리 소리를 내고

  온몸이 환히 보이는 망자(亡者)들의 부끄러움.

 

모여서 사는 것이 어디 갈대들 뿐이랴, 문학과지성사, 1986

 

 


 

 

마종기 시인 / 며루치는 국물만 내고 끝장인가

 

 

(아내는 맛있게 끓는 국물에서 며루치를

하나씩 집어내 버렸다. 국물을 다 낸 며루치는

버려야지요. 볼상도 없고 맛도 없으니까요.)

며루치는 국물만 내고 끝장인가.

 

뜨겁게 끓던 그 어려운 시대에도

며루치는 곳곳에서 온몸을 던졌다.

(며루치는 비명을 쳤겠지. 뜨겁다고,

숨차다고, 아프다고, 어둡다고, 떼거리로

잡혀 생으로 말려서 온몸이 여위고

비틀어진 며루치떼의 비명을 들으면.)

 

시원하고 맛있는 국물을 마시면서

이제는 쓸려나간 며루치를 기억하자.

(남해의 연한 물살, 싱싱하게 헤엄치던

은빛 비늘의 젊은 며루치떼를 생각하자.

드디어 그 긴 겨울도 지나고 있다.)

 

그 나라 하늘빛, 문학과지성사, 1991

 

 


 

 마종기 시인

1939년 일본 동경에서 출생. 연세대 의대 및 서울대 대학원 졸업. 월간 『현대문학』 1959년 1월호에 박두진의 추천으로 발표 이후 3회 추천 완료되어 등단. 시집으로 『조용한 개선(凱旋)』, 『두번째 겨울』, 『변경(邊境)의 꽃』,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새들의 꿈에서는 나무 냄새가 난다』, 『모여서 사는 것이 어디 갈대들뿐이랴』, 『나라 하늘빛』, 『이슬의 눈』 등의 시집과 공동 시집 『평균율』Ⅰ·Ⅱ이 있음. 한국문학작가상, 편운문학상, 이산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