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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강은교 시인 / 그대의 들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19.

강은교 시인 / 그대의 들

 

 

`왜 나는 조그마한 일로 분개하는가'로 시작되는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하네

하찮은 것들의 피비린내여

하찮은 것들의 위대함이여 평화여

 

밥알을 흘리곤

밥알을 하나씩 줍듯이

 

먼지를 흘리곤

먼지를 하나씩 줍듯이

 

핏방울 하나 하나

그대의 들에선

조심히 주워야 하네

 

파리처럼 죽는 자에게 영광이 있기를!

민들레처럼 시드는 자에게 평화있기를!

 

그리고 중얼거려야 하네

사랑에 가득 차서

그대의 들에 울려야 하네

 

`모래야 나는 얼마만큼 적으냐' 대신

모래야 우리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대신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 라고

 

세계의 몸부림들은 얼마나 작으냐 작으냐, 라고

 

벽속의 편지, 창작과비평사, 1992

 

 


 

 

강은교 시인 / 그 여자 1

 

 

아침이면 머리에

바다를 이고 오는 그 여자.

 

생굴이요 생굴!

햇빛처럼 외치는 그 여자.

 

손등엔 가득

먹구름 울고 우는 그 여자.

 

비 언제 올지 몰라

비 언제 올지 몰라

 

늘 파도치는 든든한

엉덩이 그 여자.

 

어둠보다 빨리

새보다 가벼이

 

해님하고 같이 걷는

예쁜 예쁜 그 여자.

 

소리집, 창작과비평사, 1982

 

 


 

 

강은교 시인 / 낙동강의 바람

 

 

그대 있는 곳을

나는 아네.

그러게 이리 정신없이

몸 흔드는 게 아닌가.

 

그대 잠들지 않는 이유를

나는 아네.

그러게 이리 한많은 소리로

뼈 부서지는 게 아닌가.

 

살이 살을 뜯는 거리에서

울음떼 무성한 언덕쯤에서

출렁임이 또 한 출렁임 낳아

돌아가지 못하는 것들이여.

 

오늘은 돌아가지 못하는 것들끼리

저무는 해를 만지고 있는데

 

그대 가는 곳을

나는 아네.

얼었다 녹으며

녹았다 얼며

 

이 구름 밑

살지 못해 죽는 그대

오, 죽지 못해 사는 그대.

 

붉은 강, 풀빛, 1984

 

 


 

 

강은교 시인 / 눈발

 

 

외롭지 않아요. 우린

함께 함께 내려가요. 우린

 

머리칼 죄 뜯긴 나무 위에 풀 위에

몸살 앓는 잔돌 위에 산등성이 위에

 

쇠꼬챙이 담벼락 위에

비둘기 날개 위에

 

안녕 안녕, 돌아서는 사람들 솟은 어깨 위에

납작 누운 불경기 지붕 위에

 

호텔 보드라운 창틀 위에

취기 오른 불빛 위에

 

그리고 미사 위에

언제나 언제나 홀로 서 있는 십자가 위에

 

끝내는 눈물이 되어

 

눈물이 되어 온 땅

질퍽질퍽 흐느끼게 해요

함께 함께 흐느끼게 해요.

 

소리집, 창작과비평사, 1982

 

 


 

 

강은교 시인 / 단가 세 편

 

 

붉은 해

 

여기서 해는 서산으로 지는데

붉은 해 등진 큰 벌에서

바리바리 피를 모으던 어머니

좋은 날 좋은 시를 가렸지만

부끄러워라 우리 살은

한 대접 냉수에도 쉬이 풀리는

소금이라 하더이다.

 

 

옥황상제가 온다.

옥황상제가 온다.

엄마 등에는

4천 년 묵은 늪이

황톳물이

묻혔다 다시 묻히는

아아 4천 사내의

떼죽음.

 

가는 곳

 

달이 뜬다,

산너머 칡밭에는

떨어진 눈썹 몇 개

살 몇 점

홀로 채비를 서둔다.

 

가다가 더러 귀신 만나면

가는 곳 잊지 말고 물어두게.

 

허무집, 칠십년대 동인회, 1971

 

 


 

강은교 시인

1945년 함남 홍원에서 출생. 연세대학교 영문과와 同 대학원 국문과 졸업. 1968년 《사상계》 신인문학상에 시 〈순례자의 잠〉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허무집』, 『풀잎』, 『빈자일기』, 『소리집』, 『붉은 강』, 『바람 노래』, 『오늘도 너를 기다린다』 등 다수 있음. 그밖의 저서로는 산문집 『허무수첩』, 『추억제』, 『그물사이로』 등과 동화로 『숲의 시인 하늘이』, 『하늘이와 거위』 등이 있음. 1975년 제2회 한국문학작가상과 1992년에는 제37회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