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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철 시인 / 첫사랑
고등학교 다닐 때 버스 안에서 늘 새침하던 어떻게든 사귀고 싶었던 포항여고 그 계집애 어느 날 누이동생이 그저 철없는 표정으로 내 일기장 속에서도 늘 새침하던 계집애의 심각한 편지를 가져 왔다
그날 밤 달은 뜨고 그 탱자나무 울타리 옆 빈터 그 빈터엔 정말 계집애가 교복 차림으로 검은 운동화로 작은 그림자를 밟고 여우처럼 꿈처럼 서 있었다 나를 허연 달빛 아래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 밤 얻어맞았다 그 탱자나무 울타리 옆 빈터 그 빈터에서 정말 계집애는 죽도록 얻어맞았다 처음엔 눈만 동그랗게 뜨면서 나중엔 눈물도 안 흘리고 왜 때리느냐고 묻지도 않고 그냥 달빛 아래서 죽도록 얻어맞았다
그날 밤 달은 지고 그 또 다른 허연 분노가 면도칼로 책상 모서리를 나를 함부로 깎으면서 나는 왜 나인가 나는 왜 나인가 나는 자꾸 책상 모서리를 눈물을 흘리며 책상 모서리를 깎아댔다
지상의 인간, 문학과지성사, 1984
박남철 시인 / 추석
1
`어머니 아버지 왜 나를 낳으셨나요'
연탄불이나 피우자
연탄불이나 피우고 연탄불이나 피우면서 연탄불이 다 피었으니 빨래나 하자
빨래나 하고 빨래나 하면서 빨래를 다 했으니 방이나 치우자
방이나 치우고 방이나 치우면서 방 청소를 다 했으니
발톱이나 깎자 발톱이나 깎고 발톱이나 깎으면서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
`달빛 어린 언덕엔 흰 구름만 흘러가네 어지럼 뱅뱅' `엄마야 나는 어디로 가는 걸까 고추잠자리……'
2
오빠
엄마 아빠 재홍이 언니 모두 잘 있어요 이제 며칠만 지나면 추석인데요 엄마 아빠께서는 이번 추석에는 오빠가 내려 왔으면 하는 눈치시던데 오빠의 사정은 어떠신지요
이 편지가 추석 전에 도착하면 오빠가 집으로 전화라도 해 주었으면 싶은데요
지상의 인간, 문학과지성사, 1984
박남철 시인 / 탐처(貪妻)
1
안방 도어에는 샤갈전(展)*의 포우스터가 붙어 있고
`제기랄, 그녀는 언제나 계란처럼 뾰루퉁하다'
2
아내는 오늘 아침에도 입에 바람을 물고 조둥아리가 뾰루퉁해졌다 시골집에다 편지를 쓰라니 그러는 것이다
아 맏며느리가 시부모님에게 편지를 써야 마땅하지
미술대학을 나온 아내는 쓱쓱 붓으로 김에다 참기름을 칠하며, 아 그냥 전화로 하면 되지 내가 뭐 누구처럼 글이라도 쓰나 뭐 기름붓으로 김에다 참기름을 더 열심히 칠한다 많이 해 본 솜씨다
아 언젠가는 살살 쪼개면서 `자기 소개서'란 것을 좀 써 달라기에 일언지하에 거절했더니 `헹, 시인(詩人)이 그런 것도 못 쓰나'하면서……
과부 사정을 복부인(福婦人)은 모른다고, 철없는 마누라는 그저 돈 떨어지면 질질 짜면서, `왜 울었니?'라고 물으면 `돈이 없어 운 건 아니예욧!'하고
3
대답한다……
으흐허허헛, 아내는 오늘 아침에는 내가 어젯밤에 초고를 잡아둔 이 연의삼국지(演義三國誌)를 어떻게 훔쳐 읽은 모양이다, 정색을 하면서 `아니 자기 정말 저 탐처란 것을 꼭 발표하실 생각이야요?' 한다
* 샤갈 전(展)은 8월 20일부터 덕수궁 미술관에서 열린 모양인데 우리 안방에 붙은 포스터에는 닭인지 여자인지 모를 형상과 금환식(金環蝕)을 형상한 듯한 그림이 실려 있으며 그 제목이 `부활(復活)'이라 한다.
지상의 인간, 문학과지성사,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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