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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남철 시인 / 첫사랑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19.

박남철 시인 / 첫사랑

 

 

고등학교 다닐 때

버스 안에서 늘 새침하던

어떻게든 사귀고 싶었던

포항여고 그 계집애

어느 날 누이동생이

그저 철없는 표정으로

내 일기장 속에서도 늘 새침하던

계집애의 심각한 편지를

가져 왔다

 

그날 밤 달은 뜨고

그 탱자나무 울타리 옆 빈터

그 빈터엔 정말 계집애가

교복 차림으로 검은 운동화로

작은 그림자를 밟고 여우처럼

꿈처럼 서 있었다 나를

허연 달빛 아래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 밤 얻어맞았다

그 탱자나무 울타리 옆 빈터

그 빈터에서 정말 계집애는

죽도록 얻어맞았다 처음엔

눈만 동그랗게 뜨면서 나중엔

눈물도 안 흘리고 왜

때리느냐고 묻지도 않고

그냥 달빛 아래서 죽도록

얻어맞았다

 

그날 밤 달은 지고

그 또 다른 허연 분노가

면도칼로 책상 모서리를

나를 함부로 깎으면서

나는 왜 나인가

나는 왜 나인가

나는 자꾸 책상 모서리를

눈물을 흘리며 책상 모서리를

깎아댔다

 

지상의 인간, 문학과지성사, 1984

 

 


 

 

박남철 시인 / 추석

 

 

1

 

 `어머니 아버지 왜 나를 낳으셨나요'

 

연탄불이나 피우자

 

연탄불이나 피우고

연탄불이나 피우면서

연탄불이 다 피었으니

빨래나 하자

 

빨래나 하고

빨래나 하면서

빨래를 다 했으니

방이나 치우자

 

방이나 치우고

방이나 치우면서

방 청소를 다 했으니

 

발톱이나 깎자

발톱이나 깎고

발톱이나 깎으면서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

 

 `달빛 어린 언덕엔 흰 구름만 흘러가네 어지럼 뱅뱅'

 `엄마야 나는 어디로 가는 걸까 고추잠자리……'

 

2

 

오빠

 

엄마 아빠 재홍이 언니 모두 잘 있어요

이제 며칠만 지나면 추석인데요

엄마 아빠께서는 이번 추석에는 오빠가 내려

왔으면 하는 눈치시던데 오빠의 사정은 어떠신지요

 

이 편지가 추석 전에 도착하면 오빠가 집으로

전화라도 해 주었으면 싶은데요

 

지상의 인간, 문학과지성사, 1984

 

 


 

 

박남철 시인 / 탐처(貪妻)

 

 

1

 

안방 도어에는 샤갈전(展)*의 포우스터가 붙어 있고

 

`제기랄, 그녀는 언제나 계란처럼 뾰루퉁하다'

 

2

 

아내는 오늘 아침에도 입에 바람을 물고 조둥아리가 뾰루퉁해졌다

시골집에다 편지를 쓰라니 그러는 것이다

 

아 맏며느리가 시부모님에게 편지를 써야 마땅하지

 

미술대학을 나온 아내는 쓱쓱 붓으로 김에다 참기름을 칠하며, 아 그냥 전화로 하면 되지 내가 뭐 누구처럼 글이라도 쓰나 뭐

기름붓으로 김에다 참기름을 더 열심히 칠한다 많이 해 본 솜씨다

 

아 언젠가는 살살 쪼개면서 `자기 소개서'란 것을 좀 써 달라기에 일언지하에 거절했더니 `헹, 시인(詩人)이 그런 것도 못 쓰나'하면서……

 

과부 사정을 복부인(福婦人)은 모른다고, 철없는 마누라는 그저 돈 떨어지면 질질 짜면서, `왜 울었니?'라고 물으면 `돈이 없어 운 건 아니예욧!'하고

 

3

 

대답한다……

 

으흐허허헛, 아내는 오늘 아침에는 내가 어젯밤에 초고를 잡아둔 이 연의삼국지(演義三國誌)를 어떻게 훔쳐 읽은 모양이다, 정색을 하면서 `아니 자기 정말 저 탐처란 것을 꼭 발표하실 생각이야요?' 한다

 

* 샤갈 전(展)은 8월 20일부터 덕수궁 미술관에서 열린 모양인데 우리 안방에 붙은 포스터에는 닭인지 여자인지 모를 형상과 금환식(金環蝕)을 형상한 듯한 그림이 실려 있으며 그 제목이 `부활(復活)'이라 한다.

 

지상의 인간, 문학과지성사, 1984

 

 


 

박남철(朴南喆) 시인

1953년 경북 포항에서 출생.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同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 1979년 《문학과 지성》 겨울호에 시 〈연날리기〉 외 3편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저서로는 시집으로 『지상의 인간』 (문학과지성사, 1984)와 『반시대적 고찰』(한겨레, 1988 / 세계사, 1999) , 『러시아집 패설』(청하, 1991)와『자본에 살어리랏다』(창작과비평사, 1997), 『바다 속의 흰머리뫼』 (문학과지성사, 2005), 『제1분』(문학수첩, 2009)과 시선집 『생명의 노래』(문학세계사, 1992) 와 박덕규와의 공동시집 『그러나 나는 살아가리라』 (청하, 1982)와 박남철 비평시집  『용의 모습으로』 (청하, 1990)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