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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희 시인 / 새떼
흐르는 것이 어디 강물뿐이랴 피도 흘러서 하늘로 가고 가랑잎도 흘러서 하늘로 간다. 어디서부터 흐르는지도 모르게 번쩍이는 길이 되어 떠나감 되어.
끝까지 잠 안든 시간을 조금씩 얼굴에 묻혀가지고 빛으로 포효(咆哮)하며 오르는 사랑아. 그걸 따라 우리도 모두 흘러서 울 이유도 없이 하늘로 하늘로 가고 있나니.
새떼, 민학사, 1975
문정희 시인 / 수목 사이로
왜 나는 저 쭉 쭉 뻗은 수목들을 서방삼을 생각을 못했을까
손가락을 쫙 펴고 뜻도 없이 어깨에 힘을 주고 서 있는 아이들의 그림만 쳐다 보았을까
시간은 레먼 같은 것 처음엔 향긋한 냄새도 풍기지만 찔금찔금 눈물도 나게 하지만 그러나 벗기고 나면 아무것도 안 남느니,
하늘을 찌를 듯한 검초록을 두르고
쉽게 흔들리지 않는 수목이나 서방삼아
크낙새 같은 새끼들이나 주르르 낳았어도 좋았을 것은
크낙새같이 귀한 자식들 퍼덕퍼덕 길러봐도 좋았을 것을.
찔레, 전예원, 1987
문정희 시인 / 시간 1
너의 머리칼을 만져본다.
끝없이 쏟아져 내리는 찰나 언제나 숫처녀인 그대의 몸을
신 앞에 두 손 한번 모은 적 없는 내게 무슨 은총으로 이러히 두려운 신방을 주는가.
그 앞에 떠는 나는 눈먼 짐승이다. 손만 닿으면 눈 녹듯 옛날이 되고 마는
섬뜩한 촉감에 떼밀리어 나는 뜻없이 깊어만 가는데 모르겠다.
다만 아느니 어느 날 네 머리칼 한 올 내 눈 쑤시어 나는 소멸하리라.
혼자 무너지는 종소리, 문학예술사, 1984
문정희 시인 / 시간 2
갈수록 갈수록 멀기만 하다.
너는 내가 있어 흐르는 물이 아니었다.
소용돌이었다.
그래서 나는 네가 좋았다.
위로 치솟을 땐 어지러웠고
부서져내릴 때는 신이 났다.
그 몰락조차도 재미있어 미칠 지경이었다.
그 속에 빠져 부드러이 죽어갔다.
혼자 무너지는 종소리, 문학예술사,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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