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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문정희 시인 / 새떼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19.

문정희 시인 / 새떼

 

 

흐르는 것이 어디 강물뿐이랴

피도 흘러서 하늘로 가고

가랑잎도 흘러서 하늘로 간다.

어디서부터 흐르는지도 모르게

번쩍이는 길이 되어

떠나감 되어.

 

끝까지 잠 안든 시간을

조금씩 얼굴에 묻혀가지고

빛으로 포효(咆哮)하며

오르는 사랑아.

그걸 따라 우리도 모두 흘러서

울 이유도 없이

하늘로 하늘로 가고 있나니.

 

새떼, 민학사, 1975

 

 


 

 

문정희 시인 / 수목 사이로

 

 

왜 나는

저 쭉 쭉 뻗은

수목들을

서방삼을 생각을 못했을까

 

손가락을 쫙 펴고

뜻도 없이 어깨에 힘을 주고 서 있는

아이들의 그림만 쳐다 보았을까

 

시간은 레먼 같은 것

처음엔 향긋한 냄새도 풍기지만

찔금찔금 눈물도 나게 하지만

그러나 벗기고 나면 아무것도 안 남느니,

 

하늘을 찌를 듯한

검초록을 두르고

 

쉽게 흔들리지 않는

수목이나 서방삼아

 

크낙새 같은 새끼들이나

주르르 낳았어도 좋았을 것은

 

크낙새같이 귀한 자식들

퍼덕퍼덕 길러봐도 좋았을 것을.

 

찔레, 전예원, 1987

 

 


 

 

문정희 시인 / 시간 1

 

 

너의 머리칼을 만져본다.

 

끝없이 쏟아져 내리는 찰나

언제나 숫처녀인 그대의 몸을

 

신 앞에 두 손 한번 모은 적 없는

내게 무슨 은총으로

이러히 두려운 신방을 주는가.

 

그 앞에 떠는

나는 눈먼 짐승이다.

손만 닿으면 눈 녹듯 옛날이 되고 마는

 

섬뜩한 촉감에 떼밀리어

나는 뜻없이 깊어만 가는데

모르겠다.

 

다만 아느니

어느 날 네 머리칼 한 올 내 눈 쑤시어

나는 소멸하리라.

 

혼자 무너지는 종소리, 문학예술사, 1984

 

 


 

 

문정희 시인 / 시간 2

 

 

갈수록 갈수록

멀기만 하다.

 

너는 내가 있어

흐르는 물이 아니었다.

 

소용돌이었다.

 

그래서 나는 네가 좋았다.

 

위로 치솟을 땐

어지러웠고

 

부서져내릴 때는

신이 났다.

 

그 몰락조차도

재미있어

미칠 지경이었다.

 

그 속에 빠져

부드러이

죽어갔다.

 

혼자 무너지는 종소리, 문학예술사, 1984

 

 


 

문정희 시인

1947년 전라남도 보성에서 출생. 동국대 국문과 및 同 대학원 졸업. 서울여대 대학원에서 문학 박사 학위 받음. 1969년 《월간문학》신인상에 당선되어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문정희 시집』, 『새떼』, 『혼자 무너지는 종소리』, 『찔레』, 『아우내의 새』, 『하늘보다 먼 곳에 매인 그네』, 『별이 뜨면  슬픔도 향기롭다』 등과 시극 『구운몽』, 『도미』 및 수필집  『당당한 여자』 등이 있음. 현대문학상과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동국대학교 문예창작과 겸임 교수로 재직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