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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승희 시인 / 80년대의 이름으로 촛불에게 묻노니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20.

김승희 시인 / 80년대의 이름으로 촛불에게 묻노니

 

 

촛불은 소승불교인가?

아니면 대승적인 것인가?

 

나 어느 조용한 시간에

그대 바라보며 물어 보고 싶었네.

 

촛불 아래 고요히 머리 숙이고

환한 빛 아우라처럼 받으며

글씨 숨쉬며 쓰고 있는

나(민중)에게

 

촛불은 대승불교처럼

높은 데서부터 낮은 곳에 이르기까지

나를 굽어보며

은은히 그 빛

긍휼히 나누어주느니

 

그렇다면 촛불은

대승적인 것이기만 해야 하나.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소리없이 물으면서 온몸에 울음 심지

하나 뜨겁게 박고(허무의 척추로)

 

화려한 아우라 불꽃놀이

촛불처럼 취해서

홀로 타고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되나.

 

달걀 속의 생(生), 문학사상사, 1989

 

 


 

 

김승희 시인 / 객석에 앉은 여자

 

 

그녀는 늘 어딘가가 아프다네.

이런 데가 저런 데가

늘 어느 곳인가가.

 

아프기 때문에

삶을 열렬히 살 수가 없노라고

그녀는 늘상 자신에게 중얼거리고 있지.

 

지연된 꿈, 지연된 사랑

유보된 인생

이 모든 것은 아프다는 이름으로 용서되고

그녀는 아픔의 최면술을

항상 자기에게 걸고 있네.

 

난 아파,

난 아프기 때문에

난 너무도 아파서

 

그러나 그녀는 아마도 병을 기르고

있는 것만 같애.

 

삶을 피하기 위해서

삶을 피하는 자신을 용서해주기 위해서

살지 못했던 삶에 대한 하나의 변명을

마련하기 위해서

꿈의 상실에 대한 알리바이를 주장하기 위해서!

 

그녀는 늘 어딘가가 아프다네.

이런 데가 저런 데가

늘 그저 그런 어떤 곳이.

 

달걀 속의 생(生), 문학사상사, 1989

 

 


 

 

김승희 시인 / 검은 오선지

 

 

인광(燐光)의 부호들이 찍히어 있습니다……

베토벤

모짜르트

바하보다도 더 아름다운 음표들이

내막을 알 길 없는 밤하늘의

흉곽 위에

형광처럼 반짝이며 날아다닙니다……

 

우리는 악보를 알지 못합니다

단지 음악을 들을 뿐

누구도 악보를 보지 못합니다

 

살아 있다는 것이 무서워집니다

희랍극의 배우들처럼

저항도 해보고

수수께끼와 맞서보기도 하면서

슬픔 혹은 원한으로

인생을 배워나가야 합니다

 

철도길에 나와앉아 생각해봅니다……

근심처럼 절실하게

사랑하는 사람들을,

인연의 십자가에 못박혀 가면서도

내 너를 알지 못한다고

말할 순 없습니다……

 

인광(燐光)의 부호들이 긴 선을 그으며

흘러 떨어집니다……

누군가 지금

죽고 있는 모양입니다

근조(謹弔) ― 등불이

돌아오는 나의 길을 밝혀 줍니다……

그리하여 짧은 우리의 사랑은

절망 속에 더욱 결속됩니다

 

왼손을 위한 협주곡, 문학사상사, 1983

 

 


 

 

김승희 시인 / 공포영화

 

 

나는 언제나 쫓기고 있지,

공포영화 속의 주인공 배우처럼

나는 끝까지 쫓기고 있지,

막연한 액운의 별 아래

영문 모르고 살다가

어느날 갑자기 쫓기기 시작한다는

진부한 줄거리로

지치지도 않고 계속 돌아가는

오늘도, 잠 속의 낡은 영사기……

 

이제 자막에서 비는 내리고

비를 맞으며

하염없이 쫓겨 가는 희미한 뒷모습……

무슨 범죄를 저질렀을까?

무성의 자막 위에

암호처럼 쏟아지는 희미한 외국어들,

왜 범인이 되었을까?

의문마저도 잊어버린 정박의 꽃처럼

온통 사위엔 쫓겨가는 움직임뿐……

 

바라건대 악몽은 악몽일지라도

한평생 깨지 않는 악몽이라면

그건 좋은 거야,

그건 오 케이야 ―

오, 그런데, 나는 참 찬란한 애정영화가

한편 보고 싶다,

그리고 무섭도록 사치스런 예술영화도

한편……

 

왼손을 위한 협주곡, 문학사상사, 1983

 

 


 

김승희 시인

1952년 전남 광주에서 출생. 서강대학교 영문학과와 同 대학원 국문학과 졸업. <이상 시 연구로 국문과 박사학위 받음. 1973년 《경향신문》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 199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소설에도 당선. 시집으로 『태양 미사』, 『왼손을 위한 협주곡』, 『달걀 속의 생』, 『어떻게 밖으로 나갈까』,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 『빗자루를 타고 달리는 웃음』등이 있고, 그밖의 저서로는 산문집『33세의 팡세』, 『남자들은 모른다』, 『빗자루를 타고 달리는 웃음』 등과 소설로는『산타페로 가는 사람』, 『왼쪽 날개가 약간 무거운 새』등이 있음. 현재 서강대학교 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