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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강은교 시인 / 돌아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20.

강은교 시인 / 돌아

 

 

너 아직 거기 있느냐

사월에 던진 돌아,

꽃샘바람 몹시도 불어가는

길 모퉁이

 

연탄재며 밥찌꺼기

혹은 목 떨어진 개나리꽃 새

꾸부정하게 끼어앉아

깨진 머리로 빛나는 돌아

 

으스름 무렵이면

한 잎 가득 피 베어문 하늘이

네 얼굴처럼 달려온다.

 

날이라도 궂어

출출출 비 내리쏟는 날에는

험집투성이 우리 가슴결엔

화들짝 살아오는 숨소리, 고함소리

난장판으로 강물이 흐르고

뒷산 허리에선

우르르 우르르

우뢰 몸서리 요란했다.

 

아직 거기 있느냐 너

사월에 던진 돌아,

개나리 활활 일어설 때를 기다려

아, 그 꽃잎 꽃잎에 상채기 흠씬

문댈 때를 기다려

일년이고 십년이고

수유리 한구석

차마 못 떠나는 돌아

 

네가 못 떠나는 이 땅에

올해도 사월은 가지만

우리는 영영 남아 있다 그 사월에.

 

소리집, 창작과비평사, 1982

 

 


 

 

강은교 시인 / 모래가 바위에게

 

 

우리는 언제나 젖어 있다네.

어둠과 거품과 슬픔으로

하염없는 빛 하염없는 기쁨으로

모든 세포와 세포의 사잇길을 지나

폭풍의 날개 속으로 스며든다네.

한낮에도 가만가만 스며든다네.

 

길 막히면 길 만든다네.

바람 막히면 바람 부른다네.

세계의 수억 싸움 속에

세계의 수억 죽음 속에

낮은 지붕 위란 지붕 위

썩은 살이란 살 위

 

넘치고 넘쳐서

우리는 꿈을 꾼다네.

금빛 바위가 되는 꿈을 꾼다네.

 

바람노래, 문학사상사, 1987

 

 


 

 

강은교 시인 / 무엇이라고 쓸까

 

 

무엇이라고 쓸까

이 시대 이 어둠 이 안개

줄줄 흐르는

흘러야 속이 시원한

이 불면(不眠).

 

무엇이라고 쓸까

자유롭기를

기쁘기를

시간은 즐거이 가기를

그리고

그대를 기다리길.

 

무엇이라고 쓸까

어둠 속에서 어둠이 보이지 않는데

빛이 빛을 덮어

눈물이 눈물을 덮어

죽음이 죽음을 덮는데.

 

무엇이라고 쓸까

친구야 일어서라

어둠이여 밝아라

죽음이여 저리 가라.

 

정말 무엇이라고 쓸까

아무도 없는데

저 혼자 문이 열렸다 닫힌다.

 

소리집, 창작과비평사, 1982

 

 


 

 

강은교 시인 / 물방울의 시(詩)

 

 

펄럭이네요.

한 빛은 어둠에 안겨

한 어둠은 빛에 안겨

지붕 위에서 지붕이

풀 아래서 풀이

일어서네요, 결코

잠들지 않네요.

 

달리네요.

한 물방울은 먼 강물에 누워

한 강물은 먼 바다에 누워

거품으로 만나 거품으로

어울려 저흰

잊지 못하네요.

 

이윽고 열리는 곳

바람은 구름 사이 문 사이로 불고

말없이 한 별

허공에 일어나

부르네요.

 

눈뜨라 오 눈뜨라

형제여.

 

빈자일기, 민음사, 1977

 

 


 

 

강은교 시인 / 바리데기의 여행(旅行)노래

 

 

저 혼자 부는 바람이

찬 머리맡에서 운다.

어디서 가던 길이 끊어졌는지

사람의 손은

빈 거문고 줄로 가득하고

창밖에는

구슬픈 승냥이 울음 소리가

또다시

만리길을 달려갈 채비를 한다.

 

시냇가에서 대답하려무나

워이가이너 워이가이너

 

다음날 더 큰 바다로 가면

청천에 빛나는 저 이슬은

누구의 옷 속에서

다시 자랄 것인가.

 

사라지는 별들이

찬바람 위에서 운다.

 

만리길 밖은

베옷 구기는 소리로 어지럽고

그러나 나는

시냇가에

끝까지 살과 뼈로 살아 있다.

 

허무집, 칠십년대 동인회, 1971

 

 


 

강은교 시인

1945년 함남 홍원에서 출생. 연세대학교 영문과와 同 대학원 국문과 졸업. 1968년 《사상계》 신인문학상에 시 〈순례자의 잠〉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허무집』, 『풀잎』, 『빈자일기』, 『소리집』, 『붉은 강』, 『바람 노래』, 『오늘도 너를 기다린다』 등 다수 있음. 그밖의 저서로는 산문집 『허무수첩』, 『추억제』, 『그물사이로』 등과 동화로 『숲의 시인 하늘이』, 『하늘이와 거위』 등이 있음. 1975년 제2회 한국문학작가상과 1992년에는 제37회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