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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희 시인 / 어린 사랑에게
벌판의 풀잎 칼이 네 손 베면 나의 속살에서 피가 흐르고
갈대밭 마파람이 네 맘 흔들면 나의 굴헝에서 천둥이 친다.
아, 나 홀로는 절대히 살아 있지 않음이여
너로 하여 내 목숨의 빛남이여
이 아프고 눈먼 끈을 어느 별은 알리라.
혼자 무너지는 종소리, 문학예술사, 1984
문정희 시인 / 연
어릴 때 바닷가에서 놓쳐버린 연이 햇볕이 되어 우리방에 와 걸려 있다.
종이 울리면 지금도 설레이는 이 연을 잡으려고
꽃도 꽂아두고 죽은 여자도 바쳤지만 추위만 남고
그만 날려버리려고 무수한 담배를 피워대도, 연은 하얀 웃음으로 서 있다.
나는 바닷가로 뛰어가 부는 바람에도 별처럼 울먹이며 연을 따라 하늘로 하늘로 오르다가
끝끝내 아름다운 연 속에 빠지어 파랗게 익사하고 말았다.
새떼, 민학사, 1975
문정희 시인 / 오동나무
나 바람나서 떠나며 조강지처처럼 던져놓고 간 옛집에 돌아와보니 그곳은 이상한 양말 공장이 되어 있었다.
내가 시를 쓰며 정경화를 듣던 나의 서재엔 양말들이 서로 싸움질을 하고 있고 시가 되다 만 말꼬투리와, 아직도 떨고 있는 바이얼린 음계가 발가락마다 감겨 있었다.
`잘못했어. 잘못했어' 몽당연필이 대그르르 굴러나와 검은 피를 보이며 훌쩍거렸다.
아침 저녁 차 끓이던 주전자며 우리들의 입술이 부딪쳤던 싸움닭이 그려진 찻잔하며 모서리가 닳은 모국어 시집들……
장미들은 그후 곧 자결해버렸고 잔디는 뿌리째 뒤집혀버렸다고 그 중 누군가가 귀뜸해주었다.
`지난 겨울엔 오동나무가 목에서 피가 나게 울었어요. 온 동네 사람들이 그 울음소리가 하도 기막히고 슬퍼서 겨우내 잠들지 못했어요. 그앤 그래도 죽지 않고 살아났어요'
주전자가 뾰족한 입으로 계속 울듯이 소리질렀다. 주인이 떠도는 사이 옛집은 늑골이 부서지고 피부병 3기가 되어 있었다.
오동나무는 말이 없었다. 견디는데 이골이 난 몸짓으로 희미한 나이테만 하나 더 두르고 서 있었다. 양말짝 속에 들어가 할딱이고 있는 시의 단서들과 조각난 정경화의 음계를 주워들고 나는 오동나무를 힘껏 끌어 안았다. 잠시후 함께 조용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찔레, 전예원,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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