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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마광수 시인 / 배꼽에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20.

마광수 시인 / 배꼽에

 

 

아담과 이브가 이루어 논 죄악(罪惡)의 자죽,

얼마나 넌 징그럽게 엉켜있느냐

사람의 혁명(革命)이냐 배암의 혁명(革命)이냐 하늘의 혁명(革命)이냐

 

사막같이 허허(虛虛)한 가슴 위에서

너는 재치있게 솟아난 한줄기 샘물,

하기사 너로하여 비이너스는 더욱 완전(完全)해졌으리라

 

네 속 깊숙이 새어 나오는 붉은 태아(胎兒)의 신음소리,

지금껏 스미는 그 처절(悽絶)한 살내음,

아아 억만년(億萬年) 우리 업보(業報)를 이루게 한 것.

 

신비스런 저주(詛呪)의 샘, 생명(生命)의 샘, 고통(苦痛)의 샘,

에덴에서 아담을 탈출(脫出)시킨 자유(自由)의 자죽!

 

아름다운 속박(束縛)이냐 소란스런 희망(希望)이냐

푸른 핏줄 엉켜붙어 한층 슬프게 요요(夭夭)한

―너 외로운 배꼽이여.

 

광마집, 심상사, 1980

 

 


 

 

마광수 시인 / 비밀

 

 

엿보는 것은 아름답다

 

손톱을 아주 길게 기른 여인이 긴 대나무 젓가락을 불편하게 쥐고

음식물을 위태롭게 집어 올릴 때

젓가락 사이로 살짝살짝 엿보이는 비수처럼 뾰족한 핏빛 매니큐어,

카드놀이를 할 때 카드 사이로 스쳐가는 여인의 얼굴,

부채를 손에 쥐고 있는 여자,

(이때 부채가 투명한 것일수록, 즉 차폐물(遮蔽物)이 무력하면 무력할수록 여자는 더 섹시하게 보인다)

커다란 유리잔도 효과적인 차폐물,

핑크빛 조명 아래서 커다란 와인 글라스를 통해 엿보이는 여인의 흰 가슴은 아름답다

(투명한 유리잔은 깨지기 쉽다는, 또는 깨어지기를 원하는, 여인의 상징적 신호이다)

 

사람을 차폐물로 써도 모든 것을 훨씬 아름답게 한다

한 사람을 차폐물로 이용하면서

또 다른 한 사람과 다소 안쓰럽고 감질나는 교제를 할 때

즉 삼각관계 속에서 엿보이는 그녀의 모습은 한결 매력적으로 보인다

모자를 깊게 눌러 쓴 여자도 아름답다

선글라스를 쓴 여자도 아름답다

선글라스를 쓴 여인은 다만 자기의 시선을 남들이 엿볼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오직 엿보여진다는 것만으로

스스로의 알몸뚱이조차 상상적으로 노출시킬 수 있는 쾌감이 있다

 

양복깃을 올려 목과 얼굴을 살짝 가린 여자는 아름답다

머리카락을 늘어뜨려 이마와 두 뺨을 가린 여자도 아름답다

(업 스타일의 숏커트로 얼굴을 온통 드러낸 여자는 징그럽다. 무섭다. 너무 비밀이 없다. 엿보이는 것이 없다. 그래서 당당해 보이긴 하지만 관능적이지는 않다)

 

나는 엿보이고 싶다

나는 엿보고도 싶다

비밀은 언제나 아름답다

 

자, 장미여관으로, 자유문학사, 1989

 

 


 

마광수(馬光洙, 1951. 3.10~ 2017. 9.5)

1951년 경기도의 발안에서 출생. 연세대학교 국문과를 졸업. 1983년 윤동주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음. 1977년 《현대문학》에 배꼽에 망나니의 노래, 고구려, 당세풍의 결혼. 겁, 장자사 등 여섯 편의 시가 박두진 시인에 의해 추천되어 시문단에 데뷔. 문학이론서와 평론집을 출간해오던 그는 1989년 에세이집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와 시집 『가자 장미여관으로』를 출간함으로써 세간에 화제를 모음. 《문학사상》에 장편 권태를 연재하면서 소설가로서 활동을 시작한 그는 1991년 장편 『즐거운 사라』로 인해 구속되고, 교수이던 연세대학교에서도 직위해제를 당하지만 복직됨. 2017년 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