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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종기 시인 / 목욕탕에서
물이 물을 씻는다. 부드러운 물이 단단한 물을 비빈다. 당신의 부드러운 몸을 비빈다.
우리들의 사랑도 물이었다. 겨울에 보이는 육신(肉身)의 굴곡(屈曲). 명확(明確)히 보이지 않는 외로움.
목욕을 마치면 비 마르는 주일(主日) 오후(午後)에 명륜동(明倫洞) 골목을 빠져 나가는 무지개같이, 다섯 색깔 정도의 무지개같이 가볍고 산뜻한 현기증(眩氣症)같이.
물이 물을 씻는다. 투명(透明)한 물이 투명(透明)하지 않은 물을 비빈다.
시간(時間)의 과거(過去)와 지금이 속살거리는 목욕물 소리, 내 육신(肉身)의 모든 부분이 차고도 투명한 물이 다시 되어 명륜동(明倫洞) 2가(街)나 3가(街)에 내리는 한겨울의 눈.
우리들의 사랑도 물이었다. 지금 체중(體重)에도 남아 있는 온기(溫氣).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문학과지성사, 1980
마종기 시인 / 물빛 1
내가 죽어서 물이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가끔 쓸쓸해집니다. 산골짝 도랑물에 섞여 흘러내릴 때, 그 작은 물소리를 들으면서 누가 내 목소리를 알아들을까요. 냇물에 섞인 나는 물이 되었다고 해도 처음에는 깨끗하지 않겠지요. 흐르면서 또 흐르면서, 생전에 지은 죄를 조금씩 씻어내고, 생전에 맺혀 있던 여한도 씻어내고, 외로웠던 저녁, 슬펐던 앙금들을 한 개씩 씻어내다보면, 결국에는 욕심 다 벗은 깨끗한 물이 될까요. 정말 깨끗한 물이 될 수 있다면 그때는 내가 당신을 부르겠습니다. 당신은 그 물 속에 당신을 비춰 보여주세요. 내 목소리를 귀담아 들어주세요. 나는 허황스러운 몸짓을 털어버리고 웃으면서, 당신과 오래 같이 살고 싶었다고 고백하겠습니다. 당신은 그제서야 처음으로 내 온 몸과 마음을 함께 가지게 될 것입니다. 누가 누구를 송두리째 가진다는 뜻을 알 것 같습니까. 부디 당신은 그 물을 떠서 손도 씻고 목도 축이세요. 당신의 피곤했던 한 세월의 목마름도 조금은 가셔지겠지요. 그러면 나는 당신의 몸 안에서 당신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죽어서 물이 된 것이 전연 쓸쓸한 일이 아닌 것을 비로소 알게 될 것입니다.
그 나라 하늘빛, 문학과지성사, 1991
마종기 시인 / 바다의 얼굴
바다가 희게 일어선다. 몇 번이고 일어서서 고함치며 달려나와 일상(日常)의 생활에서 탈출하려는 바다의 끝없는 몸부림의 힘 그래서 바다의 얼굴은 젊겠지.
늙은 바다는 중심으로 간다. 나이가 들면 안정이 제일이지 움직이는 세상에서 움직이지 않으면 어지러워 분간이 서지 않는다. 그 어지러움을 착각이라 믿으면서 안정제를 찾아 먹는 늙은 바다.
용기 있는 바다가 앞에 나선다. 한꺼번에 쓸려나가는 물의 무너짐, 그래서 바다의 얼굴은 파도겠지. 잭슨 폴락의 회색빛 무지개가 서고 파도가 지나간 땅은 단단하고 평화롭다. 이제는 혼자라고 말하지 않아도 된다. 다시 만개로 부서지는 그대의 꿈, 그 살결에 붙어 있는 바다의 많은 상처들.
그 나라 하늘빛, 문학과지성사, 1991
마종기 시인 / 밤 노래 1
1
내가 한국의 시인이라면 웃기지 말라고 피해 가는 영어를 잘하는 내 아들이 잠든 밤은 즐거워라. 가진 것에 약한 아내가 잠든 밤, 계산의 주판이 잠든 밤은 즐거워라. 줄 것도 받을 것도 없이 털어 버린 단촐한 행장이 즐거워라.
모든 인연에서 떨어져 나올수록 내게 더 가까이 다가오는 피부의 밤, 언제나 우리를 속상하게 하는 겹치고 겹치는 어려운 시대도 가려 주는 위안의 끝없는 넓이여.
2
외국에서 오래 손님처럼 살다 보면 다음날 고국에서 들리는 소식까지 부드럽다. 한 이십 년 물 위에 기름처럼 살다 보면 어지러워진다. 기름처럼 가벼워진다. 그래서 밤이여, 생활의 적적한 동반자여, 밤에는 장년의 주름살이 뼈에도 느슨히 보이고 귀 기울이면 땅이 우는 희한한 소리도 들린다. 환영받지 못한 예언자의 시대는 끝났다. 밤새도록 인연의 질긴 매듭을 하나씩 풀고 자유로운 몸으로 날으는 밤의 끝의 빛.
모여서 사는 것이 어디 갈대들뿐이랴, 문학과지성사, 1986
마종기 시인 / 밤 노래 4
모여서 사는 것이 어디 갈대들뿐이랴. 바람부는 언덕에서, 어두운 물가에서 어깨를 비비며 사는 것이 어디 갈대들뿐이랴. 마른 산골에서는 밤마다 늑대들 울어도 쓰러졌다가도 같이 일어나 먼지를 터는 것이 어디 우리나라의 갈대들뿐이랴.
멀리 있으면 당신은 희고 푸르게 보이고 가까이 있으면 슬프게 보인다. 산에서 더 높은 산으로 오르는 몇 개의 구름, 밤에는 단순한 물기가 되어 베개를 적시는 구름, 떠돌던 것은 모두 주눅이 들어 비가 되어 내리고 내가 살던 먼 갈대밭에서 비를 맞는 당신, 한밤의 어두움도 내 어리석음 가려 주지 않는다.
모여서 사는 것이 어디 갈대들뿐이랴, 문학과지성사,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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