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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명인 시인 / 가을강(江)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20.

김명인 시인 / 가을강(江)

 

 

살아서 마주보는 일조차 부끄러워도 이 시절

저 불 같은 여름을 걷어 서늘한 사랑으로

가을 강물되어 소리 죽여 흐르기로 하자

지나온 곳 아직도 천둥치는 벌판 속 서서 우는 꽃

달빛 난장(亂杖) 산굽이 돌아 저기 저 벼랑

폭포지며 부서지는 우뢰 소리 들린다

없는 사람 죽어서 불 밝힌 형형한 하늘 아래로

흘러가면 그 별빛에도 오래 젖게 되나니

살아서 마주잡는 손 떨려도 이 가을

끊을 수 없는 강물 하나로 흐르기로 하자

더욱 모진 날 온다 해도

 

머나먼 곳 스와니, 문학과지성사, 1988

 

 


 

 

김명인 시인 / 가을에

 

 

  모감주* 숲 길로 올라가니

  잎사귀들이여, 너덜너덜 낡아서 너희들이

  염주 소리를 내는구나, 나는 아직 애증의 빚 벗지 못해

  무성한 초록 귀때기마다 퍼어런

  잎새들의 생생한 바람소릴 달고 있다

  그러니 이 빚 탕감받도록

  아직은 저 채색의 시간 속에 나를 놓아다오

  세월은 누가 만드는 돌무덤을 지나느냐, 흐벅지게

  참꽃들이 기어오르던 능선 끝에는

  벌써 잎 지운 굴참 한 그루

  늙은 길은 산맥으로 휘어지거나 들판으로 비워지거나

  다만 억새 뜻 없는 바람무늬로 일렁이거나

 

* 모감주 나무: 무환자과(無患子科)의 낙엽 교목. 절이나 묘지 부근, 집 근처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열매는 염주(念珠)를 만드는 데 쓰임.

 

물 건너는 사람, 세계사, 1992

 

 


 

 

김명인 시인 / 갈매기 관찰

 

 

일용할 양식을 찾느라 저렇게 분주한

저기 바닷가의 갈매기들은

심심하여 몰두하는 이 하릴없는 관찰자로부터

저들이 감시당하는 줄 모르리라

물면에 내려 앉거나 파도 위를 스치거나 꿈꾸듯

울음 소릴 끌며 하늘 높이 날 뿐,

갈매기를 관찰하기에는 방파제 둑이 좋다, 혹은

바위에 기대어 몸을 은폐시키면

저로부터 아무런 방해가 없으므로 갈매기는

지척까지 쌍쌍을 이루어 난다, 저들의 선회를 바라보노라면

경쾌한 군무가 때로는

높은 비상으로부터 순식간의 추락으로 느껴지는 것은

고단한 일상이 개입하는 탓일 것이다

나처럼 이역에서조차 갈매기나 지켜보는

다만 한나절의 이런 몰두가 사람 사는 일로부터 더 멀리

스스로를 밀어내는 일이겠지만

갈매기는 내 무료함이나 메꾸어주느라 저렇게 열심히

날고 있는 것은 아니리라

나날의 먹이에서 나도 저도 결코 자유롭지 못하므로

갈매기는 유유히 떠 있다가도

무엇엔가 놀란 듯 급한 날갯짓하며 바다로 곤두박힌다

축대 위에 앉은 갈매기는 가까이 인기척이 느껴져도

옆으로 몇 걸음만 종종칠 뿐, 저도 사람이

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일까

갈매기는, 제 무리에 있는 동안이 오히려 자유롭다는 듯이

홀로 비상할 때 더욱 무겁게 난다

나는, 돌아가야 할 제 집이 있는 사람이며

벗어난 길 쓸쓸하여 오후 내내

바위 그늘에 붙어서서 갈매기들이

어디서 밤을 새우고 어떻게 잠자는지

쓸데없는 걱정거리나 만들어서

어두워서 더는 보이지 않을 때까지 갈매기를 보고 있다

가까이 있어도 갈매기는 저들

안중에 내가 없다는 듯이

짐짓 머리 위에서 날개 퍼덕이지만

 

푸른 강아지와 놀다, 문학과지성사, 1994. 11

 

 


 

 

김명인 시인 / 고래 Ⅰ

 

 

배가 닿자 어부들은 한 마리 커다란 고래를

밧줄로 달아 내렸다

사람들이 모여들고 물결이

가슴적시면서

갑자기 풍문의 바다가

부두에 펼쳐졌다

푸르디 뻗센 힘줄과 바다가 이루는 장단음(長短音)

 

고래는 눈을 뜬 채 누워 있다 성자(聖者)처럼

옆구리에 부러진 작살을 꽂고

흰 가슴을 드러내고

잘린 지느러미 곁에 우리들이 무심히 보고 있는

피를 조금 내비치며

 

상처는 햇빛 속에 드러나는가 핏자국에

파리들이 떼지어 엉겨붙는 것을 바라보면서

거듭 구걸로 떠도는

우리들의 풍경 너머로 한 마리 고래가

물살을 일으키며 힘차게 지나간다

우리들이 아직 신음으로

은밀하게 말할 뿐인 그곳으로

 

사람들은 흩어지고

흩어지며 저녁 무덤인 우리들이

저렇게 자지러지는 파도 소리에 숨 죽이는 동안

고래는 다시 묶여서 차에 실려 떠났다

그리고 우리들이 남아서

새로 낳은 아이들만 비겁하게

캄캄한 풍경 속으로 바칠 뿐

 

동두천, 문학과지성사, 1979

 

 


 

김명인(金明仁, 1946~ ) 시인

경북 울진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문학 박사 학위를 취득. 경기대 국문과 교수를 거쳐 현재 고려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중. 1973년 『중앙일보』 신춘 문예에 「출항제」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1973』 동인을 거친 그는 김창완 · 이동순 · 정호승 등과 함께 『반시』 동인에 참여해 왕성한 작품 활동을 벌임. 그는 이제까지 『동두천』(1979) · 『머나먼 곳 스와니』(1988) · 『물 건너는 사람』(1992) · 『푸른 강아지와 놀다』(1994) · 『바닷가의 장례』(1996) · 『길의 침묵』(1999) 등 여섯 권의 시집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