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화 시인 / 청량 세계
아침이다. 여름이 웃는다. 한 해 가운데서 가장 힘차게 사는답게 사노라고 꽃불 같은 그 얼굴로 선잠 깬 눈들을 부시게 하면서 조선이란 나라에도 여름이 웃는다.
오 사람아! 변화를 따르기엔 우리의 촉각이 너무도 둔하고 약함을 모르고 사라지기만 하고 있다. 그러나 자연은 지혜를 보여주며 건강을 돌려주려 이 계절로 전신을 했어도 다시 온 줄을 이제야 알 때다.
꽃 봐라 꽃 봐라 떠들던 소리가 잠결에 들은 듯이 흐려져 버리고 숨가쁜 이 더위에 떡갈잎 잔디풀이 까지끗지 터졌다. 오래지 않아서 찬이슬이 내리면 빛살에 다 쬐인 능금과 벼알에 배부른 단물이 빙그레 돌면서 그들의 생명은 완성이 될 것이다.
열정의 세례를 받지도 않고서 자연의 성과만 기다리는 신령아! 진리를 따라가는 한 갈래 길이라고 자랑삼아 안고 있는 너희들의 그 이지는 자연의 지혜에서 캐온 것이 아니라 인생의 범주를 축제(縮製)함으로써 자멸적 자족에서 긁어모은 망상이니 그것은 진도 아니요 선도 아니며 더우든 미도 아니요 다만 사악이 생명의 탈을 쓴 것뿐임을 여기서도 짐작을 할 수 있다.
아 한낮이다. 이마 우으로 내려쪼이는 백금실 같은 날카로운 광선이 머리가닥마다를 타고 골 속으로 스며들며 마음을 흔든다 마음을 흔든다―나뭇잎도 번쩍이고 바람결도 번쩍이고 구름조차 번쩍이나 사람만 홀로 번쩍이지 않는다고―.
언젠가 우리가 자연의 계시에 충동이 되어서 인생의 의식을 실현한 적이 조선의 기억에 있느냐 없느냐? 두더지같이 살아온 우리다. 미적지근한 빛에서는 건강을 받기보담 권태증을 얻게 되며 잇닿은 멸망으로 나도 몰래 넘어진다.
살려는 신령들아! 살려는 네 심원도 나무같이 뿌리깊게 땅 속으로 얽어매고 오늘 죽고 말지언정 자연과의 큰 조화에 나누이지 말아야만 비로소 내 생명을 가졌다고 할 것이다.
저녁이다. 여름이 성내었다 여름이 성내었다 하늘을 보아라 험살스런 구름떼가 빈틈없이 덮여 있고 땅을 보아라 분념(忿念)이 꼭두로 오를 때처럼 주먹 같은 눈물이 함박으로 퍼붓는다. 까닭 몰래 감흥이 되고 답답하게 무더우나 가슴 속에 물기가 돌며 마음이 반가웁다. 오 얼마나 통쾌하고 장황한 경면(景面)인가!
강둑이 무너질지 땅바닥이 갈라질지 의심과 주저도 할 줄을 모르고 귀청이 찢어지게 소리를 치면서 최시(最始)와 최종(最終)만 회복해 보려는 마지못할 그 일념을 번갯불이 선언한다.
아, 이때를 반길 이가 어느 누가 아니랴마는 자신과 경물(景物)에 분재된 한 의식을 동화시킬 그 생명도 조선아 가졌느냐? 자연의 열정인 여름의 변화를 보고 불쌍하게 무서워만 하는 마음이 약한 자와 죄과를 가진 자여 사악에 추종을 하던 네 행위의 징벌을 이제야 알아라.
그러나 네 마음에 뉘우친 생명이 굽이를 치거든 망령되게 절망을 말고 저―편 하늘을 바라다보아라. 검은 구름 사이로 흰구름이 보이고 그 너머 저녁놀이 돌지를 않느냐? 오늘 밤이 아니면 새는 아침부터는 아마도 이 비가 개이곤 말 것이다. 아, 자연은 이렇게도 언제든지 시일을 준다.
여명, 1925. 6
이상화 시인 / 초혼
서럽다 건망증이 든 도회야! 어제부터 살기조차 다―두었대도 몇백 년 전 네 몸이 생기던 옛 꿈이나마 마지막으로 한 번은 생각코나 말아라. 서울아 반역이 낳은 도회야!
월간 『開闢(개벽)』 1926. 1
이상화 시인 / 폭풍우를 기다리는 마음
오랜 오랜 옛적부터 아, 몇백 년 몇천 년 옛적부터 호미와 가래에게 등심살 벗기우고 감자와 기장에게 속기름을 빼앗기인 산촌의 뼈만 남은 땅바닥 위에서 아직도 사람은 수확을 바라고 있다.
게으름을 빚어내는 이 늦은 봄날 `나는 이렇게도 시달렸노라……' 돌멩이를 내보이는 논과 밭― 거기서 조으는 듯 호미질하는 농사짓는 사람의 목숨을 나는 본다.
마음도 입도 없는 흙인 줄 알면서 얼마라도 더 달라고 정성껏 뒤지는 그들의 가슴엔 저주를 받을 숙명이 주는 자족이 아직도 있다 자족이 시킨 굴종이 아직도 있다.
하늘에도 게으른 흰구름이 돌고 땅에서도 고달픈 침묵이 깔려진 오―이런 날 이런 때에는 이 땅과 내 마음의 우울을 부술 동해에서 폭풍우나 쏟아져라―빈다.
월간 『開闢(개벽)』 1925. 3
이상화 시인 / 허무교도의 찬송가
오를지어다, 있다는 너희들의 천국으로― 내려보내라, 있다는 너희들의 지옥으로― 나는 하느님과 운명에게 사로잡힌 세상을 떠난, 너희들의 보지 못할 머―ㄴ 길 가는 나그네일다!
죽음을 가진 뭇 떼여! 나를 따르라! 너희들의 청춘도 새송장의 눈알처럼 쉬 꺼지리라, 아! 모든 신명이여, 사기사(詐欺師)들이여, 자취를 감추라, 허무를 깨달은 그때의 칼날이 네게로 가리라.
나는 만상을 가리운 가부(假符) 너머를 보았다, 다시 나는, 이 세상의 비부(秘符)를 혼자 보았다, 그는 이 땅을 만들고 인생을 처음으로 만든 미지의 요정이 저에게 반역할까 하는 어리석은 뜻으로 `모든 것이 헛것이다' 적어둔 그 비부를,
아! 세상에 있는 무리여! 나를 믿어라, 나를 따르지 않거든, 속썩은 너희들의 사랑을 가져가거라, 나는 이 세상에서 빌어 입은 `숨키는 옷'을 벗고 내 집 가는 어렴풋한 직선의 위를 이제야 가려 함이다.
사람아! 목숨과 행복이 모르는 새 나라에만 있도다. 세상은 죄악을 뉘우치는 마당이니 게서 얻은 모―든 것은 목숨과 함께 던져 버리라. 그때야, 우리를 기다리던 우리 목숨이 참으로 오리라.
월간 『開闢(개벽)』 1924. 12
|
'◇ 시인과 시(근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목월 시인 / 눈썹 A 외 4편 (0) | 2020.02.05 |
---|---|
이병기 시인 / 냉이꽃 외 3편 (0) | 2020.02.05 |
박목월 시인 / 노대(露臺)에서 외 3편 (0) | 2020.02.04 |
이병기 시인 / 금강(錦江) 외 3편 (0) | 2020.02.04 |
이상화 시인 / 조소 외 3편 (0) | 2020.02.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