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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박목월 시인 / 눈썹 A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5.

박목월 시인 / 눈썹 A

 

 

불안하고 겁에 질린

짐승들의 검은 눈은

우리의 것이다.

타오르는 불길에 깃드는

검은 그늘을

우리는

무직한 눈썹으로

태연하게 놀리고 있을 뿐이다.

짐승들의

태고의 밤보다 어둡고

불안스러운 검은 눈은

우리의 것이다.

눈썹이 없는 짐승들은

겁에 질린 검은 눈을

두리번거리며

방황할 뿐이다.

그들은

무리를 지어,

발자국을 죽이고

숲 그늘로 헤매이지만

우리들은

눈썹 위에 손을 얹고

기우는 햇살의

시각을 가늠해 본다.

 

무순(無順), 삼중당, 1976

 

 


 

 

박목월 시인 / 눈썹 B

 

 

흰 말의 무리가 달려와서는 앞무릎이 팍팍 꿇어지며 순간마다 침몰해 갔다. 해면(海面)에.

억의 억만 필의 흰 말은 천지를 휘몰아 올리는 회오리바람 기둥으로 뻗치며 휘휘 돌며 달리며 몰아치며 침몰해 갔다.

 

해면(海面)은 설레이지 않았다. 그처럼 장엄한 비극과 좌절을 침착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 냉엄한 평온은 심야의 절규보다 전율적인 것이었다.

나는 눈썹에 두텁게 쌓이는 눈의 무게를 느끼며, 흐느끼며, 창마다 불이 환하게 켜진 채 침몰해 가는 에리자베드 퀸 같은 호화 여객선의 화려한 종말을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눈은 며칠 안으로 멎었다. 그러나 내 눈썹에 쌓인 눈은 영원히 녹지 않았다. 해저에는 가라앉은 선체(船體)의 잔해들이 널렸고, 닫힌 문은 닫힌 대로 녹이 슬었다. 지금도 흰 말의 무리가 침몰한 해면(海面)의 그 냉엄한 평온의 절규는 마른 번개가 되어 땅 끝을 울리고 있었다.

 

무순(無順), 삼중당, 1976

 

 


 

 

박목월 시인 / 당인리(唐人里) 근처

 

 

당인리(唐人里) 변두리에

터를 마련할까 보아.

나이는 들고……

한 사, 오백 평(돈이 얼만데)

집이야 움막인들.

그야 그렇지. 집이 뭐 대순가.

아쉬운 것은 흙

오곡(五穀)이 여름하는.

보리․수수․감자

때로는 몇 그루 꽃나무.

나이는 들고……

아쉬운 것은 자연.

너그러운 호흡, 가락이 긴

삶과 생활.

흙을 종일,

흙하고 친하고

(아아 그 푸근한 미소)

등어리를

햇볕에 끄실리고

말하자면

정신의 건강이 필요한.

당인리(唐人里) 변두리에

터를 마련할까 보아.

(괜한 소리, 자식들은

어떡하고, 내가 먹여살리는)

참, 그렇군.

한쪽 날개는 죽지째 부러지고

가련한 꿈.

그래도 사, 오백 평

땅을 가지고(돈이 얼만데)

수수․보리․푸성귀

(어림없는 꿈을)

지친 삶, 피로한 인생

두발은 희끗한 눈이 덮이는데.

마음이 허전해서

너무나 허술한 차림새로

(누구나 허술하게 떠나기야 하지만)

길 떠날 채비를.

기도 한 구절 올바르게

못 드리고

아아 땅버들 한 가지만 못하게

(괜찮아, 괜찮아)

아냐. 진정으로 까치새끼 한 마리만 못하게

어이 떠날까보냐.

나이는 들고……

아쉬운 것은 자연.

그 품안에 쉴

한 사, 오백 평.

(돈이 얼만데)

바라보는 당인리(唐人里) 근처를

(자식들은 많고)

잔잔한 것은 아지랑인가(이 겨울에)

나이는 들고.

 

난(蘭).기타(其他), 신구문화사, 1959

 

 


 

 

박목월 시인 / 도포 한 자락

 

 

임자, 나는 도포자라기

펄렁펄렁 바람에 날려

하늘가로 떠도는

누가 꿈인 줄 알았을락꼬.

 

임자는 포란 물감.

내 도포자라기의 포란 물감.

바람은 불고

정처 없이 떠도는 도포자라기.

 

우얄꼬. 물감은 바래지는데

우얄꼬. 도포자라기는 헐어지는데

바람은 불고

지향 없는 인연의 사람 세상.

 

임자, 나는 도포자라기

임자는 포란 물감.

아직도

펄럭거리는

저 도포자라기.

누가 꿈인 줄 알았을락꼬.

 

-<경상도의 가랑잎> 민중서관, 1968

 

 


 

 

박목월 시인 / 동물시초(動物詩抄)

 

 

염소

 

어느 날, 창경원엘 갔었다. 유심히 바라보면 모든 동물의 얼굴은 고독했다. 언어를 못 가진 것의 그 깊은 침잠.

이상(李箱)의 염소

붉은 눈자위

울고 새운 밤의 흔적이 테둘러 있었다.

 

하마

 

뚝한 얼굴이 짧은 발을 어기적거리며 내게로 다가온다. 통성명(通姓名)을 하자는 것일까. 인사를 하기에는 내 얼굴 피부가 너무나 투명하고 외면(外面)하기에는 그의 얼굴이 너무나 심정적(心情的)이다. 입을 쩍 벌리는, 사이즈를 초월한 그의 입에 푸짐하게 어울릴 언어를 생각한다. 그 투박한 언어를―얄밉도록 세련된 나의 언어는 혀끝으로 구을리기 알맞을 뿐이다.

 

타조

 

너무나 긴 목 위에서 그것은 비지상적(非地上的)인 얼굴이다. 그러므로 늘 의외의 공간에서 그의 얼굴을 발견하고 나는 잠시 경악한다. 다만 비스켓 낱을 주워먹으려고 그것이 천상에서 내려올 때, 나는 다시 당황한다. 먹는다는 것이 동심적인 천진스러운 행위일까. 누추하고 비굴한 본능일까. 확실히 타조는 양면을 가졌다. 소년처럼 순직한 얼굴과 벌건 살덩이가 굳어버린 이기적인 노안(老顔)과……

 

그리고 이 괴이한 면상(面相)의 주금류(走禽類)가 오늘은 나의 눈을 응시한다.

 

낙타

 

진실로 박복한 그 입. 소가 아무리 미련한 짐승이지만 그 든든하고 확고한 턱과 입으로 보아 조반석죽(朝飯夕粥)에 궁할 팔자가 아니다. 하지만 아랫입술이 약간 나온, 엷은 가죽이 민숭하게 처진 약대의 입은 온 얼굴이 입이다. 서러운 면상(面相)아. 물 한 모금 제대로 못 마실 운명에 순응해서, 입과는 거리를 두고, 저 안쪽에 어질고 작은 눈에 찬물이 괸 채……

 

원(猿)

 

미간이 한곳으로 몰려, 새까만 두 눈이 새끼를 보둥켜 안고 있다. 그 극진한 육친애. 협량(狹量)하기 때문에 애정이 외곬으로 쏠리는가.

 

원숭이의 얼굴은 두 개만 포개지면 사뭇 억만(億萬)의 얼굴이 모인 것처럼 슬픔의 강물이 된다.

 

아 요것아, 요것아. 미개번족(未開蕃族)들의 가슴으로 흘러가는 이 강물이 그들로 하여금 인육(人肉)으로, 번제(燔祭)를 올리게 하는 광란을 불러 일으키는 것인가

 

그리고 오늘은 내가 원숭이로 화(化)하는가.

 

청담(晴曇), 일조각, 1964

 

 


 

박목월[朴木月, 1915.1.6~1978.3.24] 시인

본명은 영종(泳鍾). 1916년 경상남도 고성(固城)에서 출생하여 경상북도 경주(慶州)에서 자람. 1935년 대구 계성(啓聖)중학 졸업. 정지용(鄭芝溶)에 의해 1939년 문예지 《문장(文章)》에 시가 추천되어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청록집(靑鹿集)』(3인시), 『경상도가랑잎』, 『사력질(砂礫質)』, 『무순(無順)』 등과 수필집으로 『구름의 서정』, 『밤에 쓴 인생론(人生論)』 그밖의 저서로는 『문학의 기술(技術)』, 『실용문장대백과(實用文章大百科)』 등이 있음. 1953년 홍익대학교 조교수, 1961년 한양대학교 부교수 및 1963년 교수, 1965년 대한민국 예술원(藝術院) 회원, 1968년 한국시인협회 회장, 1973년 시전문지 『심상(心像)』의 발행인, 1976년 한양대학교 문리과대학장 역임. 자유문학상, 5월문예상, 서울시문화상, 국민훈장 모란장 등을 수상. 1978년 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