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근대)

이병기 시인 / 냉이꽃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5.

이병기 시인 / 냉이꽃

 

 

밤이면 그 밤마다 잠은 자야 하겠고

낮이면 세 때 밥은 먹어야 하겠고

그리고 또한 때로는 시(詩)도 읊고 싶고나

 

지난 봄 진달래와 올 봄에 피는 진달래가

지난 여름 꾀꼬리와 올 여름에 우는 꾀꼬리가

그 얼마 다를까마는 새롭다고 않는가

 

태양(太陽)이 그대로라면 지구(地球)는 어떨 건가

수소탄(水素彈) 원자탄(原子彈)은 아무리 만든다더라도

냉이꽃 한 잎에겐들 그 목숨을 뉘 넣을까

 

가람문선, 신구문화사, 1966

 

 


 

 

이병기 시인 / 농촌화첩(農村畵帖) 1

 

 

웅덩마다 물 괴이고 밤에는 개구리 소리

동산에 숲이 짙어 낮이면 꾀꼬리 소리

그 바쁜 마을 집들은 더욱 적적(寂寂)하여라

 

앞뒤 넓은 들이 어느덧 검어졌다

모기와 벼룩 거머리 뜯기다가

겉절인 글무 김치에 보리밥이 살지운다

 

일심은 오려논에 기심이 길어 있다

헌 삿갓 베 잠방이 호미 메고 삽 들고

내 일은 내가 서둘러 새벽부터 나간다

 

울마다 호박넌출 그 밑에 가지 고추

비는 오려 하는 무더운 저녁 날에

똥오줌 걸찍한 냄새 온 마을을 적신다

 

몇 만년(萬年) 걸고 걸은 기름진 메와 들을

갈고 고르고 심고 거두고 하여

일찍이 우리 조상도 이 흙에서 살았다

 

가람문선, 신구문화사, 1966

 

 


 

 

이병기 시인 / 농촌화첩(農村畵帖) 2

 

 

구릉(丘陵) 구릉(丘陵) 구릉(丘陵) 그 사이 사이 마을

금만경(金萬頃) 회마밋들 한편엔 임익평야(臨益平野)

진실로 남국(南國)의 옥토(沃土) 제일곡창(第一穀倉) 아닌가

 

잔디 비알 이뤄 갓 배추 심어 두고

진펄이라도 밀 보리 밭을 삼고

말만한 큰아기들이 똥오줌을 이고 온다

 

쌀값은 떨어지고 부감은 더럭 불어

풍년이 들어도 벼 한 섬 둘 것 없고

새봄만 돌아온다면 도로 주릴 뿐이라네

 

가람문선, 신구문화사, 1966

 

 


 

 

이병기 시인 / 눈 2

 

 

새벽 잠을 깨어 창문을 열고 보니

남고(南固) 고달(高達)이 모두 다 북악(北岳)이다

때아닌 하이얀 눈이 가득 가득 쌓였다

 

늙은 나의 몸에 병이야 더하든 말든

남고(南固) 고달(高達)에 눈이야 쌔든 말든

서둘러 이 봄 안으로 삼팔선(三八線)만 터져라

 

가람시문선, 신구문화사, 1966

 

 


 

이병기(李秉岐) 시인 / 1891∼1968

호: 가람(伽藍). 시조 시인. 국문학자. 전북 익산에서 출생. 1913년에 관립 한성 사범 학교를 졸업하고, 보통 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고문헌 수집과 시조 연구에 전념하였다.1921년에 조선어 연구회를 조직하였고, 1926년에 <시조란 무엇인가>를 발표한 이래 현대 감각의 시조로 침체된 시조 문학을 크게 일으켰다. 1930년에 <한글 맞춤법 통일안> 제정 위원을 거쳐 1935년에는 조선어 표준어 사정 위원이 되었고, 그 후에<가람 시조집>을 발표, 자연의 생생한 묘사를 통하여 현대 시조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1942년에는<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수감되어 1년여 동안 복역하다가 석방된 후 귀향하여 농업에 종사하면서 고문헌 연구에 몰두하였다. 광복 후 상경하여 미군정청 편찬과장, 서울 대학교 문리과 대학 교수 등을 거쳐 1954년에는 학술원 회원이 되었으며, 그 해 백철과 공저

로 <국문학 전사>를 간행하였다. 그는 현대 자유시에 압도된 시조의 부흥에 큰 공헌을 하였고, 저서에는 <국문학 개론> <가람 문선>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