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기 시인 / 냉이꽃
밤이면 그 밤마다 잠은 자야 하겠고 낮이면 세 때 밥은 먹어야 하겠고 그리고 또한 때로는 시(詩)도 읊고 싶고나
지난 봄 진달래와 올 봄에 피는 진달래가 지난 여름 꾀꼬리와 올 여름에 우는 꾀꼬리가 그 얼마 다를까마는 새롭다고 않는가
태양(太陽)이 그대로라면 지구(地球)는 어떨 건가 수소탄(水素彈) 원자탄(原子彈)은 아무리 만든다더라도 냉이꽃 한 잎에겐들 그 목숨을 뉘 넣을까
가람문선, 신구문화사, 1966
이병기 시인 / 농촌화첩(農村畵帖) 1
웅덩마다 물 괴이고 밤에는 개구리 소리 동산에 숲이 짙어 낮이면 꾀꼬리 소리 그 바쁜 마을 집들은 더욱 적적(寂寂)하여라
앞뒤 넓은 들이 어느덧 검어졌다 모기와 벼룩 거머리 뜯기다가 겉절인 글무 김치에 보리밥이 살지운다
일심은 오려논에 기심이 길어 있다 헌 삿갓 베 잠방이 호미 메고 삽 들고 내 일은 내가 서둘러 새벽부터 나간다
울마다 호박넌출 그 밑에 가지 고추 비는 오려 하는 무더운 저녁 날에 똥오줌 걸찍한 냄새 온 마을을 적신다
몇 만년(萬年) 걸고 걸은 기름진 메와 들을 갈고 고르고 심고 거두고 하여 일찍이 우리 조상도 이 흙에서 살았다
가람문선, 신구문화사, 1966
이병기 시인 / 농촌화첩(農村畵帖) 2
구릉(丘陵) 구릉(丘陵) 구릉(丘陵) 그 사이 사이 마을 금만경(金萬頃) 회마밋들 한편엔 임익평야(臨益平野) 진실로 남국(南國)의 옥토(沃土) 제일곡창(第一穀倉) 아닌가
잔디 비알 이뤄 갓 배추 심어 두고 진펄이라도 밀 보리 밭을 삼고 말만한 큰아기들이 똥오줌을 이고 온다
쌀값은 떨어지고 부감은 더럭 불어 풍년이 들어도 벼 한 섬 둘 것 없고 새봄만 돌아온다면 도로 주릴 뿐이라네
가람문선, 신구문화사, 1966
이병기 시인 / 눈 2
새벽 잠을 깨어 창문을 열고 보니 남고(南固) 고달(高達)이 모두 다 북악(北岳)이다 때아닌 하이얀 눈이 가득 가득 쌓였다
늙은 나의 몸에 병이야 더하든 말든 남고(南固) 고달(高達)에 눈이야 쌔든 말든 서둘러 이 봄 안으로 삼팔선(三八線)만 터져라
가람시문선, 신구문화사, 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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