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기 시인 / 도중점경(途中點景)
고랑 다랑 배미 살얼음 끼어 있고 퍼런 보리밭에 까마귀 날아 앉고 들 너머 먼 산(山)머리론 아지랑이 잦았다
산(山)은 산(山)이로되 돌이나 흙만 남아 소쩍새 한 마리 깃들일 곳이 없고 갓 나는 잔솔 포기는 그 언제나 자랄는고
나아가고 보면 점점 트이는 이 골 강(江)과 바다 끼인 옥야(沃野) 천부(天府)이지만 갈 들어 거둔다 해도 남을 것이 없다네
가람문선, 신구문화사, 1966
이병기 시인 / 매화 부제 : 고목(古木) 된 야매화(野梅花)를 수년(數年) 기르다 얼려 죽이고
외로 더져 두어 미미히 숨을 지고 따듯한 봄날 돌아오기 기다리고 음음한 눈얼음 속에 잠을 자던 그 매화(梅花)
손에 이아치고 바람으로 시달리다 곧고 급한 성결 그 애를 못 삭이고 맺었던 봉오리 하나 피도 못한 그 매화(梅花)
다가오는 추위 천지를 다 얼려도 찾아 드는 볕은 방으로 하나 차다 어느 뉘[世] 다시 보오리 자취 잃은 그 매화(梅花)
가람시조집, 문장사, 1939
이병기 시인 / 바람
난데없는 바람 거리를 휩쓸고 몰아 온다 쓰던 모자를 쓰면 다시 떨어지고 분주히 오고가는 이를 기롱(欺弄)하듯 하여라
가로 선 애나무들 싱싱히 푸르도다 시들고 병든 잎만 날린다고 믿지 마라 덧없는 바람에 불려 꺾일 줄을 어이 알리
가람시조집, 문장사, 1939
이병기 시인 / 백묵(白墨)
몸을 담아 두니 마음은 돌과 같다 봄이 오고 감도 아랑곳없을러니 바람에 날려 든 꽃이 뜰 위 가득하구나
뜰에 심은 나무 길이 남아 자랐도다 새로 돋는 잎을 이윽히 바라보다 한 손에 백묵(白墨)을 들고 가슴 아파하여라
가람시조집, 문장사,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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