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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이병기 시인 / 도중점경(途中點景)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6.

이병기 시인 / 도중점경(途中點景)

 

 

고랑 다랑 배미 살얼음 끼어 있고

퍼런 보리밭에 까마귀 날아 앉고

들 너머 먼 산(山)머리론 아지랑이 잦았다

 

산(山)은 산(山)이로되 돌이나 흙만 남아

소쩍새 한 마리 깃들일 곳이 없고

갓 나는 잔솔 포기는 그 언제나 자랄는고

 

나아가고 보면 점점 트이는 이 골

강(江)과 바다 끼인 옥야(沃野) 천부(天府)이지만

갈 들어 거둔다 해도 남을 것이 없다네

 

가람문선, 신구문화사, 1966

 

 


 

 

이병기 시인 / 매화

부제 : 고목(古木) 된 야매화(野梅花)를 수년(數年) 기르다 얼려 죽이고

 

 

외로 더져 두어 미미히 숨을 지고

따듯한 봄날 돌아오기 기다리고

음음한 눈얼음 속에 잠을 자던 그 매화(梅花)

 

손에 이아치고 바람으로 시달리다

곧고 급한 성결 그 애를 못 삭이고

맺었던 봉오리 하나 피도 못한 그 매화(梅花)

 

다가오는 추위 천지를 다 얼려도

찾아 드는 볕은 방으로 하나 차다

어느 뉘[世] 다시 보오리 자취 잃은 그 매화(梅花)

 

가람시조집, 문장사, 1939

 

 


 

 

이병기 시인 / 바람

 

 

난데없는 바람 거리를 휩쓸고 몰아 온다

쓰던 모자를 쓰면 다시 떨어지고

분주히 오고가는 이를 기롱(欺弄)하듯 하여라

 

가로 선 애나무들 싱싱히 푸르도다

시들고 병든 잎만 날린다고 믿지 마라

덧없는 바람에 불려 꺾일 줄을 어이 알리

 

가람시조집, 문장사, 1939

 

 


 

 

이병기 시인 / 백묵(白墨)

 

 

몸을 담아 두니 마음은 돌과 같다

봄이 오고 감도 아랑곳없을러니

바람에 날려 든 꽃이 뜰 위 가득하구나

 

뜰에 심은 나무 길이 남아 자랐도다

새로 돋는 잎을 이윽히 바라보다

한 손에 백묵(白墨)을 들고 가슴 아파하여라

 

가람시조집, 문장사, 1939

 

 


 

이병기(李秉岐) 시인 / 1891∼1968

호: 가람(伽藍). 시조 시인. 국문학자. 전북 익산에서 출생. 1913년에 관립 한성 사범 학교를 졸업하고, 보통 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고문헌 수집과 시조 연구에 전념하였다.1921년에 조선어 연구회를 조직하였고, 1926년에 <시조란 무엇인가>를 발표한 이래 현대 감각의 시조로 침체된 시조 문학을 크게 일으켰다. 1930년에 <한글 맞춤법 통일안> 제정 위원을 거쳐 1935년에는 조선어 표준어 사정 위원이 되었고, 그 후에<가람 시조집>을 발표, 자연의 생생한 묘사를 통하여 현대 시조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1942년에는<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수감되어 1년여 동안 복역하다가 석방된 후 귀향하여 농업에 종사하면서 고문헌 연구에 몰두하였다. 광복 후 상경하여 미군정청 편찬과장, 서울 대학교 문리과 대학 교수 등을 거쳐 1954년에는 학술원 회원이 되었으며, 그 해 백철과 공저

로 <국문학 전사>를 간행하였다. 그는 현대 자유시에 압도된 시조의 부흥에 큰 공헌을 하였고, 저서에는 <국문학 개론> <가람 문선>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