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목월 시인 / 동정(冬庭)
뜰을 쓰는 대로 가랑잎이 비오듯 했다.
마른 국화 향기는 차라리 섭섭한 것.
아, 쓸쓸한 뜰에 구름은 한가롭지 않다.
저, 어지러운 구름 그림자.
반생을 덧없이 보내고
나머지 한나절을 바람이 설렌다.
산에는 찬 그늘이 내리고
새들도 멀리 가고 말았다.
난(蘭).기타(其他), 신구문화사, 1959
박목월 시인 / 동행(同行)
갈밭 속을 간다. 젊은 시인(詩人)과 함께 가노라면 나는 혼자였다. 누구나 갈밭 속에서는 일쑤 동행(同行)을 놓치기 마련이었다. 성형(成兄) 성형(成兄) 아무리 그를 불러도 나의 음성은 내면으로 되돌아오고 이미 나는 갈대 안에 있었다. 바람이 부는 것도 아닌데 갈밭은 어석어석 흔들린다. 갈잎에는 갈잎의 바람 백발(白髮)에는 백발(白髮)의 바람 젊은 시인(詩人)은 저편 기슭에서 나를 부른다. 하지만 이미 나는 응답할 수 없었다. 나의 음성은 내면으로 되돌아오고 어쩔 수 없이 나도 흔들리고 있었다.
-<경상도의 가랑잎> 민중서관, 1968
박목월 시인 / 매몰
통금의 철책 안에서 눈발 속에 묻혀가는 것들을 생각한다. 그 아늑한 매몰과 부드러운 망각으로 세계는 한결 정결해진다. 철책조차 눈에 묻히고 잠이 든다. 모든 루울의 흰 라인은 베일 저편으로 몽롱하게 풀리고 드디어 발자국 소리가 들리지 않는 아침이 열린다.
무순(無順), 삼중당, 1976
박목월 시인 / 모과수(木瓜樹) 유감
여전히 있군. 그 나무는. 청록집의 내 작품을 쓸 무렵의 모과수(木瓜樹). 지훈(芝薰)을 기다렸다. 저 나무 아래서. 서울서 내려 오는 낯선 시우(詩友)를.
이십 년의 세월이 어제 같구나. 모과수(木瓜樹)는 여전한 그 모습. 늙어서 나만이 이 나무 아래서 오늘은 구름을 쳐다보는가.
덧없는 세월이여. 어제 같건만, 젊음은 갈앉고 머리는 반백(半白). 반평생 경영(經營)이 시구(詩句) 두어 줄. 너를 노래하여 싹튼 박목월(朴木月)도 이제 수피(樹皮)가 굳어졌는데……
오늘은 그 나무 아래서 모과수(木瓜樹)의 묵중한 인종을 배울까부다. 함께 나란히 벗들도 늙고, 환한 이마에 주름이 잡혔는데
늙어서 오히려 태연한 좌정. 잎새는 바람에 맡겨버리고 스스로 열리는 열매를 거둠하고 때가 이르면 환한 눈을 감으려니.
여전히 있군. 그 나무는 박물관 처마에서 두어 자국 뜰로 나와. 산수유와 나란히 어깨를 겨누고. 비스듬히 이마를 하늘에 기댄 채 빛나는 궁창(穹蒼)을 억만 년의 세월을 자랄 듯한 미소로.
난(蘭).기타(其他), 신구문화사, 1959
박목월 시인 / 모성(母性)
그것을 무엇이라 명명할 것인가. 다만 어린것의 손을 잡고, 앞으로, 보다 높은 세계로. 맹목적으로 달리는, 안으로.
타오르는 이 꺼질 날 없는 불덩이를…… 그것은 달리는 것에 열중하고 달리는 것으로 열중하여, 앞으로, 보다 높은 세계로 달리는. 나이 든 줄도 모르는, 다만 그의 손을 잡고, 달리는 달리는
그 인생의 보람. 그 빛나는 모성의 하늘. 이마에 얹은 것은 사과가 아니다. 하늘이 베푸는 스스로의 총명 그것은 다만 어린것의 손을 잡고. 보다 높은 삶의 세계로 줄달음질치는 그것은 회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망설이지 않는다. 다만 줄달음질치는 이 백열적인 질주…… 이 아름답고 눈물겨운 본능
크고 부드러운 손, 영산출판사,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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