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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이병기 시인 / 비 1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8.

이병기 시인 / 비 1

 

 

모종의 오뉴월이 가물고 더위러니

시원한 비 한번에 만인(萬人)이 웃음이네

마르던 삼천리(三千里) 안의 산(山)도 들도 다 웃네

 

다만 빗소리요 저녁은 고요하다

어느 때 날아왔나 시렁에 앉은 제비

고개를 자옥거리며 젖은 깃을 다듬네

 

비는 오다 마다 구름은 갈아들고

이따금 왜가리는 북(北)으로 날아가니

장마나 아닌가 하고 다시 하늘 바라보네

 

모기는 한두 마리 전등(電燈)에 부딪히고

비인 마루 우에 고양이 자욱이다

누워도 잠이나 오랴 내 무엇이 그리워

 

가람시조집, 문장사, 1939

 

 


 

 

이병기 시인 / 비 3

 

 

고운 돌과 물은 이르는 골마다로라

보고 잠착하여 저물어 돌아오다

갑자기 비를 맞으며 선방(禪房) 찾아드노라

 

선방(禪房) 한모르에 승은 조을고 있고

가늘게 나리던 비 소리 점점 굵어지고

나무 숲 울밀한 속에 어둔 빛은 짙어라

 

가람시조집, 문장사, 1939

 

 


 

 

이병기 시인 / 비

 

 

밤은 깊어지고 비는 줄줄 내린다

타던 거문고 한옆에 비껴 놓고

무단히 눈물지으며 누를 그려 하는고

 

가람문선, 신구문화사, 1966

 

 


 

 

이병기 시인 / 서향(瑞香)

 

 

어두운 깊은 밤을 나는 홀로 앉았노니

별은 새초롬히 처마 끝에 내려보고

애연한 서향(瑞香)의 향은 흐를 대로 흐른다

 

밤은 고요하고 천지(天地)도 한맘이다

스미는 서향(瑞香)의 향에 몸은 더욱 곤하도다

어드런 술을 마시어 이대도록 취하리

 

가람시조집, 문장사, 1939

 

 


 

이병기(李秉岐) 시인 / 1891∼1968

호: 가람(伽藍). 시조 시인. 국문학자. 전북 익산에서 출생. 1913년에 관립 한성 사범 학교를 졸업하고, 보통 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고문헌 수집과 시조 연구에 전념하였다.1921년에 조선어 연구회를 조직하였고, 1926년에 <시조란 무엇인가>를 발표한 이래 현대 감각의 시조로 침체된 시조 문학을 크게 일으켰다. 1930년에 <한글 맞춤법 통일안> 제정 위원을 거쳐 1935년에는 조선어 표준어 사정 위원이 되었고, 그 후에<가람 시조집>을 발표, 자연의 생생한 묘사를 통하여 현대 시조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1942년에는<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수감되어 1년여 동안 복역하다가 석방된 후 귀향하여 농업에 종사하면서 고문헌 연구에 몰두하였다. 광복 후 상경하여 미군정청 편찬과장, 서울 대학교 문리과 대학 교수 등을 거쳐 1954년에는 학술원 회원이 되었으며, 그 해 백철과 공저

로 <국문학 전사>를 간행하였다. 그는 현대 자유시에 압도된 시조의 부흥에 큰 공헌을 하였고, 저서에는 <국문학 개론> <가람 문선>등이 있다.